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 우리의 참회와 발원 -

그동안 실상사와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에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또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게 되어 죄송한 마음 그지없습니다. 얼마 전 실상사에서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을 알림과 함께 참회와 다짐의 마음을 전합니다.

■ 사건의 경위

지난 3월 25일 실상사에서 경작하는 토지 한 곳에 발아전제초제와 토양살충제가 사용된 것 같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해당 농지는 실상사 뒤쪽 산자락에 위치한 묵은 농토로 올해 다시 개간하여 밭을 만든 곳으로 실상사 내부에서 먹을거리를 짓기로 한 곳입니다.

이에 사실을 확인한 바, 그 제보가 사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해당농지에서 농사를 지었던 분은 지난 해 절에 들어와 살림을 돌봐주시는 분이었는데, “개간 한 땅이다 보니 풀을 잡기가 어려울 것 같고 땅속에 해충이 많아 처음에 한 번은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려야 농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공동체식구들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기에 사실 확인 후 당혹감과 절망,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감정상태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 이후 경과

이에 공동체의 각 영역대표로 구성된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회의(이하 공동체회의)’에서는,

- 이번 사건을 우리 공동체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로(정체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한다.

- 당장 해당농지에 경작을 중지한다.

- 재발방지대책을 세우고, 우리 공동체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는다.

- 이 사건의 경위, 참회와 다짐을 담은 문서를 대중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게시한다.

는 내용을 함께 공유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기 위해 여러 차례의 거듭된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해당농지에 대한 추가경작은 중지하였지만, 감자는 자라났고 수확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감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공동체구성원간에 논의가 있었고, 의견들이 개진되었습니다. 그 의견의 맥락은 대략 두 가지인데, 첫째, 참회의 마음으로 감자를 수확하지 않고 그대로 폐기한다. 둘째, 감자를 수확한 뒤, 실상사공양간에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나머지는 판매하지 않고 필요로 하는 이웃에 나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견이 존재함에 따라 공동체의 전체 식구가 두 차례에 걸쳐 장시간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두 번째 의견으로 뜻이 모아졌습니다. 이에 따라 공동체 식구들이 함께 감자밭에 모여 참회와 성찰의 기도를 올린 뒤 감자를 수확하였고, 필요한 이웃에 나누고 있습니다.

■ 참회와 다짐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는 각자 영역의 활동을 잘 돌보는 일이 공동의 가치와 목표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바쁘게 살아왔습니다. 이 또한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공동의 가치와 목표를 위한 활동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노력이 할애되었고, 따라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성찰에 소홀했음을 뜻합니다. “일(삶)과 수행이 하나 되는 공동체”라는 슬로건에서 한 날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러한 문제의식이 있었고, 성찰의 과제가 제기되어왔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의 반영으로 2016년 ‘공동체회의’를 통해 정체성 세우기를 과제로 갖고 가던 차에 이번 사건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상처와 고통의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그 안에서 아름다운 생명의 싹들이 피어나는 것을 벌써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참회합니다.

생명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고 생태계를 교란시킨 우리의 이기적 욕망의 행위를 참회합니다.

우리의 이기심으로 애초 자기 삶터인 땅속에서 무참히 학살당한 뭇생명들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첫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실상사농장을 비롯하여 이 청정한 땅은 부처님 몸이요 뭇생명의 삶터입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생태적이고 조화로운 생명평화세상을 가꾸겠습니다.

나와 우리, 그곳에서 생명을 살리는 존재로 더불어 살아가겠습니다.

거듭거듭 참회하고 다짐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다시는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반기부터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토론과 공부를 시작할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살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삶과 수행이 하나 되는 공동체’로 잘 살아가겠습니다.

실상사사부대중공동체에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신 많은 분들에게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 올리며, 이 참회와 발원을 세상의 유정무정 모든 부처님 전에 바칩니다.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 공동체회의 위원일동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