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드라망 20주년 특집 | 같이 사는 삶, 가치 있는 삶 ① 주요섭 님
‘한 사람’을 잘 아는 것이
전환의 시작이다
길을 가다 보면 갈림길도 나오고 절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길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드라망 20년을 맞아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모색을 위해 올해 말까지 몇 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 손님으로 공동체, 생명, 협동, 영성 등 전환의 삶을 열고 있는 한살림의 주요섭 님을 만났습니다.
향민_ 오랜만입니다. 개인 또는 사회적으로 요즘 가장 큰 화두는 무엇인가요?
요섭_ 요즘 제게 화두는 ‘한 사람’이다. 한살림에서 일을 하다 보니까 가장 큰 고민 중 하나가 시스템과 개인 ‘한 사람’에 대한 것이다. 공동체도 어떻게 보면 시스템인데 사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원하든 원하지 않던 국가라는 사회적 체계에서 태어나고, 가족이라는 체계 안에서 태어나고 이 안에서 이게 전부 또는 일부라고 생각하며 분리 또는 동일시하면서 살아간다. 사춘기가 되면서 가정에서부터 내가 가족의 일부분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라는 자각이 생기고, 글로벌 세상에선 내가 대한민국 국민만은 아니다 라는 자각을 하듯이 그런 것에 대한 고민이 있다.
시스템을 자각한 사람, 내가 시스템 속에 있지만 시스템만으로 설명되고 싶지 않고 설명하고 싶지 않은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는 조직 안에 여러 가지 갈등이 혼재 되어 있는데 개인적 감정, 관계, 조직 체계와 제도 등이 혼재 되어 있어 혼돈이 있는 것 같다. 역할과 개인 사이에 혼돈이 있고, 역할과 나를 동일시하게 되면 페르소나랄까, 사회적 페르소나와 동일시 해 뜻대로 안 되면 분노하고 인정을 못 받는다 생각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나’라고 자각 되어 지는 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분리해서 보기도 어렵다. 그때의 그 한 사람을 시스템의 한 부분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무슨 동물이다 이렇게 설명하기도 어렵고 영적 존재다 라고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어렵다. 복합적이고 다중적이다. 그런데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것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다.
향민_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네요. 우리가 태어나서 살다 보면 누구나 그 지점에 봉착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 질문을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 문제를 잘 다루지 않으면 사는 데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요섭_ 특히 나이 오십대 중반이 되니 더 그런 것 같다. 아주 현실적인 고민이다. 조직 안에서도 그렇고 가족 안에서도 그렇고.
향민_ 시대 상황을 공유하면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시대를 어떻게 보고 있나요? 선생님 책 《전환 이야기》를 보면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는데 요즘 가장 관심이 가는 분야나 주제가 있을까요?
요섭_ ‘한 사람’ 얘기를 했는데 한 사람이 복합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만으로도 복합적인 존재인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거나 다른 존재들이 모여 있는 사회나 자연은 훨씬 더 복잡할 것으로 예상이 된다. 최근에 저도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하고, 패거리 싸움하고, 권리만 주장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갈등이 증폭된다고 생각한다. 제가 사는 정읍에 가서 봐도 그렇다. 개인 대 개인, 한 사람으로 만나면 자신의 복잡성이랄까 혼란스러움을 호소하기도 하고 관계가 괜찮다. 그런데 조직이나 그룹으로 만나면 그것과 동일시해서 그룹의 일원으로 자기를 내세워서 이기려고 하고 싸움이 된다. 그게 80년대에 비해 더 심해진 것 같다.
생명평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분노도 잘하고 편도 잘 나누고 이런다. 저는 그런 걸 목격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설명하는 것을 보면서 요새 내린 결론 중 하나가 세상이 복잡해졌는데 우리가 예상하는 속도보다 복잡성이 훨씬 더 커지고 빨라지고 있다고 표현하고 싶다.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예를 들어 부산에서 서울을 간다 했을 때 갈 수 있는 경우의 수가 예전에는 예측 가능했다. 지금은 예측이 안 된다. 어떤 길로 갈지, 어떤 방법으로 갈지 워낙 경우의 수가 많으니까 예측 불가능한 상태가 된다. 문명의 변화로 복잡성 증가가 내가 측정하거나 예측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특히 나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이 느끼는 속도는 더 그렇다. 지금 이십대가 느끼는 복잡성 증대 속도는 다를 테다. 그런데 우리 세대들 386세대, 민주화 세대, 산업화 세대처럼 동일한 규범을 공유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엄청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최근에는 별로 괴로워하지 않게 되었다. 너무 복잡해지니까 내가 못 따라 가는 것뿐이지 젊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살아가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걱정이 놓이는 부분이 생겼다. 요즘 부처님 공부를 조금 하는데 부처님이 ‘선과 악도 없다’ 하시는데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향민_ 불확실성이 커진 것도 있지만 혹시 우리의 관념이 모든 것을 다 예측하고 관리 가능해야 한다고 여긴 건 아닐까. 예전에는 문건을 작성할 때 정세 분석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중요하지 관계 속에서 전체를 보는 힘은 약해진 것 같다. 예측 불가능하게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것도 맞지만 인간 자체가 불확실한 존재인 것 같기도 하다. 불교에선 인간을 무한한 확장성이 있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복잡성이라고 표현하셨는데 탄력성이 있다. 사회적 인연 조건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이 인간이다. 세대별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사회일수록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한 것 같다.
요섭_ 세대별로도 그렇고 사회적으로 개인에게도 준거(표준)가 있는 것 같다. 그런 준거들이 상호 소통이 잘 안 되니까 혼란스러운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저는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해졌다. 한 인간도 복잡해지고 있다. 인간의 복잡성도 우리가 예측하지 못할 만큼 급속하게 변해 가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기준은 내면의 선악 구분도 아니고 복합적이고 복잡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넘나든다. 제가 20대 초반의 딸 둘과 살면서 대화를 많이 나누는데 많이 배운다. 한 사람의 복합성 그 부분을 느낀다. 대화를 하면 셋 사이에 사회적 권력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또한 같이 사니까 공동의 규칙이 만들어진다. 우린 가족이라는 기본 베이스가 있고 성인이 되었으니까 새로 만들어지는 규칙과 언어도 달라졌다. 어떨 땐 싸우기도 하지만 공통의 시선이랄까 언어가 만들어지는 것 같다. 차이가 난다는 걸 인정하고 우리는 ‘블랙박스 대 블랙박스다’ 하면 일단 한 수 접고 들어간다. ‘나는 너를 몰라. 너도 나를 모른다’는 걸 인정하면 공동의 규칙을 만들어 가기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근데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면 어려워진다.
- 2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