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농사일기
- 황대중 -
눈 덮인 들판
처마 밑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
주둥이에 묻은 눈쪼가리를 털어내는
까치의 몸짓조차도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것이 없다
문득 돌아보면
무척 고달팠던 한 해였다
어느 것 하나 정돈된 것이 없이 시작한 농장
몸뚱아리 하나로 버티고 버티며 살아왔던 해였다
때를 알면 아는 대로
때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아서, 보여서, 일들이 눈에 밟히고
몰라서 지나치면 나중엔 산더미처럼 쌓이는 게
시골일이다
봄도 다 지나고 여름이 시작될 무렵,
새파라이 잘 자라선 감자잎이 하나 둘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하루밤 지나면 또 그 옆골이,
다음날 자고 일어나면 또 그 옆골이
트랙터에 경유를 핏물처럼 부여넣고
생때같던 감자밭을 갈 때
나는, 우리는 우리 내면에 이토록 잔인함이 도사리고 있었던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아직 피지도 못한 감자꽃들이
로타리 지나간 자리에 눈물처럼 얼룩질 때
우리는
아무런 말없이
막걸리 한잔 마신다
그리고
한참을 말이 없다가
또 한잔 퍼마시고
물장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일어선다
빡빡 긁어도 물달개비 뿌리는 감자뿌리보다도 훨씬 억샜다
꽃잎은 그저 아름다운 물잠화일 뿐
눈은 항상 저- 끝 저--끝 이 줄이 끝나는 그 곳에
가있다
멀-다
사는 것이 다 그렇지, 농삿일이 다 그렇지...
오늘은 한생명 식구들과 논 피사리를 한다
뽕짝도 부르고 육자배기 한가락씩 불러가면서
볼따구가 뻘겋게 풀독이 올라도
얼굴 덕지덕지 흙물이 말라 있어도
돌아오는 얼골엔 더더욱 하얀 이가 눈부시고
더욱더 맑아진 눈빛이 자랑스럽다
역시 여럿이 함께 고단한 일을 쳐 나간다는 것은
말로 끄집어낼 수 없는 포만감이 있다
그저 그렇게 매미소리가 퍼지고 고추잠자리 하늘을 나는 가을이 왔다
그 많던 고추는 누가 언제 땄는지도 모르게 뽀짝뽀짝 잘 말라가고 있다
실상들 앞 나락들은 지난 태풍에 다행히 무사하다
목성기운 받자고 세워놨던 대나무 피라미드만 태풍이 가져갔을 뿐
들판은 큰일 없이 지나갔건만......
그래, 이가 아니면 잇몸이지
날아간 생활관을 대충 치우고
알곡이 튼실해진 황금들판으로 낫들고 콤바인 몰고 신나게 달려간다
소출이 썩 괜찮다
그래 이 맛이지 서너포기만 쥐어도 꽉 들어차는 낫질이 쏠쏠하다
또 마신다, 막걸리 한 잔
이제는 왁자지껄 말들이 많다
지나는 길손에게도 술 한잔 권할 만큼 제법 여유를 부린다
이젠 콩이다
코 시꺼멓게 먼지가 쌓여도
탱글탱글 꽉찬 알갱이를 보면
연신 즐거움이 가득하다
“그래 인자부터 소주를 먹자 날씨 차가워징께”
두루치기 안주에 소주 한잔 밥 3공기 말아 먹으며
가을 따가운 햇볕 널어진 콩알들로
마음이 매끄럽게 미끄러진다
그래 시골사는 재미가 이것이제.
눈 덮인 지리산 천왕봉
그 눈부신 산을 뒤로한 농장 앞 들판은
이젠
모두 비어있다
이제 눈 내린, 눈 덯인 들판에 일들이 안보일 터
술맛도 덜할 것이다.
한해의 끝자리
그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슬픔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노여움도
다시 술맛나는 내년을 기약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