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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인드라망생명공동체 &gt; 인드라망생명공동체 &gt; 인드라망 칼럼</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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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삶과 인드라망] ‘응병여약’의 대화법과 평화</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62</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STRONG><FONT size=3 face=돋움>‘응병여약’의 대화법과 평화</FONT></STRONG></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인드라망생명공동체 제1실현지인 산내마을에 와서 산 지 1년 반이 되어간다. 주로 20, 30대 청년들과 섞여 살면서 무엇이든 기꺼이 배우려 애쓰지만, 때론 고민스럽거나 잘 안 고쳐지는 것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대화 습관이다. 얼마 전에는 회의 석상에서 누군가의 의견이 ‘부적절하다’라고 말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사실 부적절하다는 말은 ‘잘못됐다’, ‘틀렸다’라는 말에 익숙한 어른 세대에게는 꽤 점잖은 축에 속하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고, 누군가에게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았다. 거기에는 남의 의견이나 행위를 평가하는 자체를 터부시하는 정서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nbsp;&nbsp;&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산내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의 하나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불편하다”는 말이었다. 이 말에 매우 강력한 어필의 뜻이 담겨있다는 걸 처음에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지. 옳은 말이 편케만 들리지는 않을 테니까” 하면서 개의치 않았다. 때로는 논리를 앞세워 상대를 굴복시키는 대화도 마다치 않던 나에게 불편하다는 정도의 표현이 심각하게 들리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무식한 데다 용감하기까지 해서인지 수도 없이 ‘불편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제는 물이 들어서 가끔 나도 이 수줍은 표현을 쓰곤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불편하다’는 표현은 여전히 나에게 조금 불편하게 다가온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20, 30대 청년들(편의상 청년세대라고 하자)과 대화하면서, 대화 패턴에 큰 차이가 있음을 느낀다. 우선 인칭이 다르다. 청년세대는 대체로 1인칭 화법을 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저는 원하지 않아요.” 하는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의견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기성세대들은 대부분 3인칭이다. 나라는 표현은 거의 없고 (사실은 자기 의견이면서도) “그것은 틀려요. 맞아요.”라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말한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또 청년세대는 대체로 느낌을 중시하지만, 기성세대 대개는 견해를 중시한다. “저는 좋은 것 같아요. 예뻐요”와 같이 청년들이 자기 느낌을 말하는 것과 달리, 기성세대는 옳고 그름을 우선하여 이야기한다. 돌이켜봐도 내 느낌은 물론이거니와 내 의견을 말하면서 살아본 적이 별로 없다. 어릴 적에는 권위 있는 어른들의 의견을 수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머리가 굵은 이후로는 대의와 가치에 압도되어 내 느낌,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죄스럽고 사치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집단이 개인을 압도하는 시절에 산 기성세대 대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대화습관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청년세대들이 가까운 사이에도 ‘00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라는 권유식 표현을 주로 쓰는 반면 기성세대가 ‘00해야한다’는 당위적 표현을 쓰는 것도 차이다. 물론 성숙한 어른들은 권유식 표현을 많이 쓰고 나도 노력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해야 한다’ 혹은 좀 순화시켜 ‘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청년세대들은 주로 ‘(자기)의견’을 말하지만, 기성세대들은 ‘(관찰자인 듯)평가’한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은 누군가가 자기를 평가하는 자체를 싫어한다. “그건 아니야”와 같은 부정평가뿐만 아니라, “괜찮네. 잘했어”라는 긍정평가도 정도만 차이가 있을 뿐 누군가에게 평가 대상이 된다는 자체에 거부감이 크다. 열심히 살기만 하면 대체로 기회가 보장되었던 기성세대들과 달리 경쟁, 그것도 소수만을 위한 극도의 경쟁이 고착된 사회 풍토에서 자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이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사실 우리 세대는 내 생각이 어떻고 저떻고 표현하는 것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여 금기시하는 풍토에서 자랐다. 나와 내 느낌은 억압해야 하는 것이었고, 내 생각을 당당히 말하는 것은 아무리 옳아도 돈키호테처럼 튀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렇다 보니 대화를 할 때도 ‘나’는 쏙 빠지고, ‘우리’만 있었다. 어렸을 땐 친구집단이 우리였고, 청년 때는 이념을 같이하는 동지가 우리였다. 우리끼리는 의리를 위해, 대의를 위해 허물을 들춰서는 안 되었고 우리 바깥의 것들은 단호하게 비판하며 맞서 싸웠다. 안과 밖이 다르고, 공과 사가 다른 것이 익숙한 풍토였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만연한 일상의 폭력은 이러한 이율 배반에서 묵혀져 온 것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미래 세대에게 미안한 점이기도 하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런데 견해를 나(엄밀히 말하면 우리)로 삼는 기성세대의 습관은 문제가 있고, 느낌을 나로 삼는 청년세대의 풍토는 괜찮은 것인가? 내 느낌이,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아야 하는가? 내 느낌, 마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그것들은 예외 없이 나 아닌 것과 접촉하며 생겨난 것이다. 나를 자극하는 바깥의 것들은 누가 만든 것인가? 수많은 다른 나가 만들어 낸 것이다. 거기에는 좋은 동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실상인데도 과연 나와 내 느낌에 의존하는 것은 지혜로운 태도인가? 기성세대들이 집단 과잉, 견해 과잉에 치우쳤다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청년들 스스로 자기 과잉, 느낌 과잉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청년세대들이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는 종종 어려움을 느끼지만, 세대 간 대화 패턴의 차이가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십수 년 밖에 안 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와 청년세대 간의 대화 패턴 자체가 크게 차이 남을 알게 됐고,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하며 더 나은 쪽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짧게 결론을 말하면 자기 과잉이나 집단 과잉, 느낌 과잉이나 견해 과잉과 같은 양극단을 넘어 중도적인 대화 패턴을 찾아내야 하지 않는가 싶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는 두 시간 정도 강의하면 기진맥진할 정도로 말에 사용하는 에너지 소모가 큰 편이다. 그래서 말보다는 글이 편한 축에 속한다. 말을 할 때도 체계 있게 논리적으로 잘 하지도 못하고, 상대에 맞게 차근차근 말하는 데도 익숙하지 않다. 뭔가 당위에 사로잡히면 용건 중심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 대학의 청년들한테도 알게 모르게 준 상처가 적지 않을 것이어서 미안한 마음, 조심스러운 마음을 늘 한 켠에 품고 지낸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남의 말로 상처받거나, 누군가에게 말로 상처 주고 후회한 경험 한 두 번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뱉어진 순간 시비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래서 말은 늘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하고 살수도 없으니 말도 어찌 보면 어느새 중늙은이가 된 나처럼 ‘계륵’ 같은 신세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말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순간에 내가 용기를 내는 것은 붓다 때문이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고 난 후 전법을 망설이는 모습이 경전에 나온다. 이런저런 설명이 붙었지만, 따지고 보면 말이 갖는 한계와 효용을 놓고 두루 고민한 흔적이 아닌가 싶다. 가끔 어지간하면 말하지 말자고 하다가도 붓다께서 긴 침묵을 깨고 말로 전법에 나선 일화를 생각하며, 말이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하려 애쓴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이다. 붓다는 어떻게 대화하셨을까? 한마디로 정리하면 ‘응병여약’의 대화법이지 않았을까 싶다. 붓다는 대화하는 이가 처한 처지와 상황에 따라 느낌을 중시할 때는 느낌을 중시하고 견해를 중시할 때는 견해를 중시하셨다. 권유해야 할 때는 부드럽게 권유하고 마땅한 일에는 당위로 말씀하셨다. 단호함이 필요할 때는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할 때는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침묵해야 할 때는 오랫동안 침묵하셨다. 한마디로 맥락과 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말씀하신 분이 붓다가 아닌가 싶다. 그렇게 말을 잘 쓰면서도 말로부터 자유로워짐을 통해 붓다는 일상의 평화를 누리셨다. 나로서는 아직 언감생심의 먼 길이지만, 그래도 그 길로 가는 것을 멈추지는 않을 작정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글_ 정웅기 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BR>지리산 실상사 생명평화대학에서 청년들과 공부하며 새로운 사회, 길을 모색하고 있다.</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Fri, 08 Jun 2018 11:51:20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나의 가족 탈출기</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61</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나의 가족 탈출기</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인간의 성장은 다른 동물에 견주어 더딘 편이라고 한다. 생후 몇 시간 만에 일어나 자신의 몸을 가누고 몇 개월 안에 생존 기술을 익혀 부모 품을 떠나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십수 년간, 부모의 시각을 빌어 세계를 발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규정한다. 나는 나의 부모님의 시각으로, 나의 부모님은 그들의 부모님의 시각으로… 어쩌면 한 개인의 인생은 특별한 전환이 없는 한, 조상의 삶을 변주하는 과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적된 습관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삶을 꾸리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는 인드라망 활동가로 일하고 있다. 인드라망 활동가에게는 다양한 자리를 통해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듣고 묻고 반복하여 새기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 과정을 통해 지난 삶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나는 늘 스스로를 결함 있는 존재로 여기며 결함을 고치고 결핍을 채워 특별하고 완성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했고, 내 영혼의 동반자와 특별한 경험을 찾아 어딘가로 떠났다. 무엇을 결함과 결핍으로 여겨 고치고 채우는 이런 노력을 애써서 했을까?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동안 나는 ‘아버지는 나에게 무언가를 해낼 똑똑하고 능력 있는 딸이 되길 기대한다. 어머니는 나를 이미 힘든 삶에 하나 더 얹어진 부담으로 여긴다.’라는 이야기를 믿고 반복하여 상연하고 있었다. 난 스스로 알아서 잘하는 딸이 되어 어머니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어머니를 사랑했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믿음직한 딸이 되어 특혜를 얻어냈다. 그렇게 애써 노력하는 것으로 나의 존재를 정당화했고,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것에 상처받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마음 밑바닥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전달되지 않음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 그리고 외로움으로 베어진 가슴의 상처로 깊은 분노와 슬픔이 쌓여갔다. 그러나 나의 분노를 드러내어 내게 제한되게나마 사랑과 안전을 제공하는 부모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 분노를 막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도록 가슴을 꽁꽁 묶었다. 가끔 내면의 분노가 드러날 때면, 두려움과 분노 사이의 갈등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나를 바닥으로 끌어 내리는 것 같았다. 특히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삶의 활력을 나의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는 데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십 대부터 난 꾸준히 집을 떠날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러나 몸은 집을 떠났는지 몰라도 마음은 여전히 부모님에게 묶여 있었다. 사랑에 굶주려 있으면서도 상처받을까 봐 엄마를 외면했듯 사람에게서 멀어지려는 마음이 컸다. 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나를 보호해줬으면 하는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세상이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가 되어 여전히 장소와 시간을 불문하고 나의 마음을 두드렸다.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굴러가는 세상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실망으로 난 수시로 분노했고 상처받았다. 그리고 이 절망감과 슬픔을 지속해서 느끼며 살 수가 없어 가슴을 닫았다. 부모님으로부터 온전한 수용과 보호를 갈구했지만, 좌절했던 기억은 여전하여 내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주무르기도 했다. 누군가의 부모가 되어도 전혀 모자라지 않을 나이임에도, 여전히 그 늪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하는 내 모습은 말뚝에 매어 제 자리를 빙빙 도는 짐승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이렇게 유아기적 소망과 기대, 분노, 좌절, 슬픔 위에 구축된 삶은 허약하고 위태로웠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다행스러운 일은 이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생존의 두려움에서 벗어나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부모님에게 생존을 의지하느라 꽁꽁 묶어두었던 마음을 하나씩 걷어내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고 또 어떻게 살고 싶은지를 발견하는 과정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다른 사람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믿음직한 사람이 되는 것. 이런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는 어떤 사람일까?</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살면서 내가 바랐던 보호와 안도감을 느꼈던 때를 기억한다. 무언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 집에 왔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2013년 아르헨티나 어느 부부의 농장에서 지낼 때 처음 받았다. 유명한 이과수 폭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그 농장에서 생태 뒷간을 사용하고, 그것을 퇴비로 이용하여 텃밭을 만들고, 생태 건축으로 집을 짓고, 사유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계곡에서 더위에 지친 몸을 씻었던 그 기억은 행복하고 안전함을 느꼈던 기억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이전에는 혼자 애써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막막했다. 그런데 그 농장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내가 어느 큰 그룹 안에 속해 있고 내가 들어감으로써 하나의 원이 완성된 느낌, 비로소 뿌리내린 느낌, 그로 인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소속감과 안정감, 안도감을 느꼈다. 전 생애를 걸고 내가 찾아다니던 게 그것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것이 아마도 공동체 감각이었나 보다. 생명의 공동체 안에서, 생태적 순환에 참여하는 자체로 기쁨과 즐거움, 안정감이 있음을 알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이전처럼 도시의 임금노동자가 되어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돈을 통해서만 다른 것과 연결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쉽게도 나의 가족 역시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공동체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바란 공동체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의지하여 각자의 완성을 돕는 온전한 존재로 여기고 존중하기보다 우리는 서로를 자신의 기대와 필요를 충족시킬 수단으로 보았다. 나의 가족을 탈출하여 멀리서 돌이켜보니 그랬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공동체로 산다는 것을 깊이 공부하게 한다. 이곳에 온 것만으로 모든 어려움이 일거에 해결되었으면 좋겠지만, 여기서도 여전히 나의 습관은 나를 휘두르고 사람들과 멀어지고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다만 이전과 달리 지금은 그 휘둘림에 큰 심리적 손상을 받지 않는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순히 사람들만의 공동체를 넘어 생명의 공동체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미약하지만, 그 노력으로 생명에 뿌리내린 소속감과 다른 사람이 내게 기대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맨얼굴 그대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안정감을 얻어가고 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비록 시작은 결함을 고치고 결핍을 채우기 위한 탈출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여정을 통해 지금 여기에 다다랐으니, 인생의 고통도 버릴 것 하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생명의 공동체 안에서 자리를 잘 잡아보려는 노력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지금 이대로의 내 삶이 꽤 괜찮다. 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남들보다 특별한 사람이 되지 않아도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다. 더불어 사는 다른 사람들이 고맙고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면 삶이 보람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켠이 든든해진다. 한 가지 더 소망한다면, 하루빨리 나의 가족도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든든하게 사는 삶을 선택하였으면 좋겠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 김한나 생명평화대학 활동가<BR>생명평화대학 1기를 졸업하고, 유명유실(有名有實)한 삶을 살기 위해 인드라망에서 활동하고 있다.</FONT></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Fri, 04 May 2018 16:04:00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한반도의 진정한 봄을 위하여</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60</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한반도의 진정한 봄을 위하여</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는 긴 겨울을 보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2차 대전에서 일제가 패망하고 찾아온 해방이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휴전선이라는 경계 속에서 민족의 동질성보다 국가의 이질성이 심화하는 7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은 그런 가운데서도 국내 총생산 규모(GDP) 세계 10위권에 드는 경제 대국이 되었고, 제도의 민주화도 상당한 수준으로 이루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놀라운 성과에도 양극화가 심해져 새로운 신분 사회를 연상케 하며, 행복이나 안전을 나타내는 지표들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도적인 민주주의는 진척되었지만,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의식과 괴리 때문에 갈등과 대립을 민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의 문턱에서 심각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아직 진정한 봄은 오지 않았는데, 요즘 봄소식이 들린다.<BR>&nbsp;<BR>그 소식은 오래전에 해결되었어야 할 ‘휴전(休戰)을 종전(終戰)으로 마무리 짓는 일’이 핵전쟁 위기까지 간 막바지에 이르러서 그 가능성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뇌관이 있다. 우선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남북·북미 정상회담의 암초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 가운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은 남북이 ‘우리 민족끼리’나 ‘통일’ 같은 대결과 갈등의 원인으로 되는 구호들에서 벗어나, 남북 수교·북미 수교·북일 수교를 통해 북한의 국가안전 보장(체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그 체제는 외부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가 결정하는 것)을 하고 북의 비핵화를 끌어내는 일이다. 아마도 북미 정상회담에서 실질적으로 결판이 날 수 있도록 지혜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남북은 동족 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와 함께 두 국가로 평화·공존하면 된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남북 간의 평화 공존이 국제적인 보장 속에서 이루어지더라도 그것은 제대로 된 시작일 뿐이다. 남과 북은 각각의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외부적 환경 만들기보다 더 어려운 내부적 개혁을 성공시켜야 한다. 북은 개혁 개방과 왕조 체제에서 정상국가로 연착륙할 수 있느냐가 과제이고, 남은 지금 빠져 있는 함정을 벗어나 안정된 새로운 유형의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것이 과제다. 물론 남북이 동족으로서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각각의 과제는 기본적으로 자기 몫이다. 북(北)의 개혁이 성공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스스로에 달려 있다. 따라서 언급을 피한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투 트랙(두 바퀴)을 공개적으로 제안해 왔다. 하나는 ‘남북 두 국가의 평화공존’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의 보혁 연합(합작)을 통한 선진국 진입’이다. 이 둘은 유기적으로 연관된 두 바퀴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보혁 연합은 지금의 함정을 벗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고 있다. 세계 10위권에 오른 경제의 총체적 생산력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양극화·이중화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현상적으로 보면 ‘기업 중심주의’와 ‘사람 중심주의’가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미래가 어둡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 경제는 부존자원의 성격상 교역 국가의 위상을 유지 강화하는 것, 즉 수출 주도형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기업이 견인했고(물론 많은 부작용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도 대기업의 혁신 동력이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점차 견실한 중소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중소기업 중심으로는 가기 힘들 것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양극화 해소는 자본-노동의 틀로 보아서는 해결이 어렵게 변화되었다. 1% 대 99%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동안 10% 대 90%의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 즉, 노동의 양극화 해소가 전체적인 양극화 해소에 중요한 과제로 되고 있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전문가에게 맡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내가 제안하는 연합은 양극단 세력의 연합이 아니다. ‘건강한’ 보수와 진보가 중심 무대로 나오면 양극단은 쇠퇴해서 주변부로 가게 되어 있다. 현실을 볼 때 보수와 진보의 정체성조차 애매한 정당 대 정당의 연합은 어려워 보인다. 그것은 당리당략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권력 쟁취의 과정으로 그치기 쉽다. 그래서 나는 당내 연합(사람과 노선의 합작)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보수 정당과 진보 정당이 형성되는 방향으로 변해 가는 것이 좀 더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새로운 보수 정당은 기업의 역동성을 살리는 데 역점을 두지만, 동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바탕으로 시장(市場)의 선진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새로운 진보정당은 양극화 해소에 역점을 두지만, 먼저 노동의 양극화 해소를 견인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하고, 이를 기초로 시장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다. 이 두 그룹(정당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다당제로 되어 보수연합이나 진보연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 경쟁·보완하는 정치, 교대로 집권해도 나라의 큰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로 발전하는 정치가 아마도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연합(합작)’이 아닐까 한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하나 더 보탠다면 의식과 생활양식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제3의 영역을 그려볼 수 있다. 녹색·협동·사회적 경제·마을 운동들을 토대로 한 정치세력이다. 새로운 문명 추구가 그 핵심 목표가 될 것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가장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새로운 문명의 선진 복지국가’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한반도의 미래가 아닐까? 우리 내부에 발생하는 고기압의 모습이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적극적으로 견인하는 동력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정말 어렵사리 다가오는 봄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했으면 한다. 한반도 내부에 진정한 고기압이 발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지혜와 힘을 모아 오랜 역사를 바꿀 만한 동력을 만들어야 가능한 일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팍스 로마나(Pax Romana)’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와 같은 지배적인 힘에 의한 평화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 평화의 질서를 선도하는 위대한 꿈을 꾸어볼 수 없을까! ‘팍스 코리아나(Pax Koreana)’의 꿈을!</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글_ 이남곡 인문운동가·연찬문화연구소 이사장<BR>자기변혁과 세계변혁이 둘이 아닌 하나로 되는 것을 구현하기 위해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인문운동가입니다.</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Mon, 02 Apr 2018 12:17:54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나도, 여기 함께</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9</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나도, 여기 함께</STRONG></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2016년 5월 강남역 사건(노래방 화장실에 숨어 기다렸다가 여자가 들어왔을 때 살해한 사건) 이후, 슬픔과 연대의 물결이 강남역을 뒤덮었다고 들었다. 처음 이 사건을 들었을 때, ‘여자라서 당했다’라고 데자뷰되는 소름 끼치는 두려운 기억들이 각자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각자의 일상과 연결된 그 기억과 연결해서 추모와 연대의 마음이 거대한 공명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FONT>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역사적 사건들은 조금 의외이기도 하다. 왜냐면 이전에도 약자에 대한 폭력, 여성에 대한 폭력은 늘 있었지만, 이런 규모의 반응을 받았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시대의 에너지는 무엇일까? 지진파처럼, 응축돼 있던 것이 터져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에너지는 차곡차곡 쌓여 왔을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세계사적으로 여성이 투표권을 가진 지도 100년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지금도 중동의 몇몇 나라는 여성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미소지니(mysogyny, 여성 혐오) 문화라고 하는 젠더 불평등에 기인한 여성 혐오의 역사는 인류 역사 이래 수 천 년이라 하고, 그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석상들처럼 우리 문화 안에 각인되어 있다. 남녀노소 누구나 경험하는 미소지니의 한 모습으로는 명절 풍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부계혈통 중심의 조상을 기리는 제사상을 차리는 이는 다른 성을 가진 며느리들이다. 여성들의 사회활동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여성은 가정에서 살림과 육아까지 제대로 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일상적인 성폭력(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야동-리벤지포르노(헤어진 전 여자 친구와의 섹스 동영상을 인터넷상에 공유)의 유통, 소라넷 사건,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살인(강남역 사건, 제주도 올레길 사건, 최근 제주 게스트하우스 살인 사건, 오래전 화성 연쇄살인 등). 이런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여성들에게는 일상이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뿐 아니라, 여성들은 공적 활동 체계 안에서 남성들의 보조자로 역할을 하고 있다. 주요 방송사의 메인 앵커는 경력 있는 남자이고, 여성 앵커는 젊고 예쁜 사람이다. 전체 여성의 46.4%가 경력 단절을 경험하고, 남녀 간 임금격차는 여성이 남성보다 37.2%가 낮다. 사회적으로 젠더에 따른 위계가 있다는 것, 내가 그것을 알건 모르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최근에 문화계 미투(me too), 위드유(with you) 운동을 보면서 많은 감정이 일어난다. 쌓이고 쌓인 것들이 터져 나오는 역동, 혁명적 상황에 고무되기도 하고, 그 고통이 느껴져 마음이 쓰리기도 하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나도 자라면서 친족 내에서, 학창시절 술자리에서, 대중교통 안에서 크고 작은 경험을 하였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없던 일로 지우면서 평생 나 혼자 가져가야 하는 일로 묻어놓고 살고 있다. 직장 내 성폭력으로 힘들어하는 친구가 경찰서를 오가며 고군분투할 때, 그 친구에게 어떻게 힘을 주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다. 업계에서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하는데 갈등을 드러내는 것이 친구를 더 힘들게 하지는 않을지, 이렇게 몸과 마음이 아픈데 빨리 잊고 전환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nbsp;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 사건들을 접하면서 쓰린 마음 중 하나는 성폭력을 허용하고, 방관하고, 외면하는 태도로 살아온 내가 이 강간문화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 문제를 잘 다루어 온 경험이 없다. 그런 경험을 들어본 적이 없다.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피해자는 말하는 것부터가 고통이기 때문에 그냥 혼자 묻고 가기를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이 그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건, ‘과거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것(서지현 검사 글에서 재인용)’이기 때문이다. 많은 고발자가 강조하는 점은 ‘이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 사건의 피해자로만이 아니라, 이 은폐와 묵인을 끝내는 운동의 ‘주체’로 가해자와 사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이고,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실천이다. 그분들의 용기에 힘입어, 우리는 문제를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던져진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부처님은 사성제-고집멸도에서 고성제를 말씀하셨다. 고통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하나이다. 고성제는 도를 얻기 위해서 고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직면하고, 깊이 들여다보아야 도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라 해석한다. ‘있는 그대로’ 그 고통을 보아야 한다. 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 앞서 말한 미소지니 문화와 권력의 문제, 그리고 혐오문화가 아닐까 싶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명백한 폭력인 성폭력은 어떻게 자행되고 은폐될까? 묵인과 방조, 우유부단과 무기력 속에서 오랫동안 이어진 폭력이다. 연희단거리패 사람들이 수십 년간 그 안에서 살아왔듯이,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이 안에서 살아왔다. 지워버리고, 묻어버리고, 무뎌지고 무너지면서.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돼지 발정제 강간 모의를 한 사람이 그 이야기를 책에 쓰고도 버젓이 제1야당의 당대표를 하고 있다. 골프장 캐디, 기자를 성추행한 사람들도 버젓이 국회의원으로 산다. 성폭력 의혹을 받는 남자 배우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또 적당한 배역을 맡아 연기로 보답하겠다며 이미지를 세탁한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점차 혼미해졌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 문제를 직시해야 한다. 바름을 세워야 한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것이라거나, 피해자의 인격이 이상하다는 말은 문제가 가리키는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고, 그것이 의도적이든 무지에 의한 것이든 바르지 못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수많은 용기 곁에서 ‘나도’, ‘함께’하겠다는 연대이며 자기 성찰이 아닐까? 침묵과 방관을 넘어 드러내고 토론하고 대화하여 바름을 세우고, 우정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닐까?</FONT>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제까지 남성의 언어로 쓰인 익숙한 세계에 다른 언어로 쓰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지금까지의 낡은 익숙함을 버리고 낯선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는 것. 이것이 숙처방교생(熟處放敎生) 생처방교숙(生處放敎熟)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한다)하는 방법으로 세상을 보는 수행이 아닐까 한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고통을 똑바로 보고, 해결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더 나아갈 수 있다.</FONT> 
<DIV></DIV>
<DIV>&nbsp;</DIV>
<DIV>&nbsp;</DIV>
<DIV>글_ 최수옥 작은학교 교사<BR>자연 속에서 아이들과 북덕북덕이며 즐겁게 살아간다.</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Mon, 05 Mar 2018 13:38:25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마을길을 걸으며 들여다본 평화의 속살</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8</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마을길을 걸으며 들여다본 평화의 속살</STRONG></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저는 지금 인천 연안부두에서 팽목항까지 세월호가 갔던 뱃길을 따라 54일간 8백여km를 걷는 순례길 위에 서 있습니다. 지난해 세월호를 교훈 삼아 사회적 성찰과 전환의 순례길을 만들자고 마음 모은 후 진행되는 세 번째 여정입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청년들이 나서 한반도에 높아진 전쟁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평화의 씨앗을 뿌려보자고 나선 길이기도 합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4·16순례길은 특별히 마을과 마을을 이어 조성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쌩쌩 달릴 일직선 도로가 필요하지 굽이진 옛 마을길이 무슨 소용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 거의 걷지 않고 차로만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길이 단순히 이동시간을 버리는 공간으로 받아들여질 테니까요.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하지만 길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길 위에는 사람이 있고, 자연이 있고, 사회가 있으며, 오랜 세월 그것들이 빚어온 사회적 생명체인 마을이 있습니다. 마을이 길과 집, 농사와 자연, 사람과 동식물, 사회활동이 집약된 하나의 생명체라면, 마을길은 마을이라는 생명체를 유지해 주는 혈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을길은 자연지형을 따라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사람이 다니고 다녀서 굽이굽이 형성되었습니다. 마을길은 마을 안 집집을 이어주고, 작은 시내나 야트막한 야산을 끼고 마을과 마을을 연결해 줍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순례를 통해 만난 마을길은 주변 풍광과 잘 어울리는 은근하고 멋스러운 길이었습니다. 마을길을 통해 마을로 들어서면 수백 년 자리를 지킨 큰 나무들이 먼저 순례자를 반깁니다. 그 밑에 소박한 정자라도 한 칸 있으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그런 마을은 왠지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길을 따라 마을 속으로 들어가 보면 논과 밭, 집들이 각양각색으로 서 있습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들의 땀방울과 시간의 무게가 느껴집니다.&nbsp;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한국의 마을은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거칠고 빠른 변화의 격랑에 빠른 속도로 변화하였습니다. 마을길도 같은 운명을 겪은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큰 포장도로에 밀려 잡풀이 무성하거나, 큰 농장이나 공장으로 난 길의 위세에 눌려 사람의 흔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거친 변화 속에서도 대부분의 마을길들은 아직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걸으며 마을 속을 넘나드는 것만으로도 묘한 설렘과 향수를 주었습니다. TV나 매체로 보거나, 차를 타고 스치듯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마을길을 걸으며 거쳐 간 한 마을이 1백여 개는 넘는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화성, 평택, 아산, 당진, 서산 등 수도권과 가까운 지역의 마을 상당수는 이미 난개발이 임계치를 넘어선 듯했습니다. 축사와 공장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고, 어떤 곳은 심한 악취가 풍겼습니다. 사람이 오히려 공장과 축사의 틈바구니에 끼어 사는 듯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누구든 그런 마을로 이주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니 방치한다면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마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한국사회가 유럽과 같이 지역과 마을이 살아있는 공동체적이고 분산된 사회로 변화하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업화와 근대화를 넘어설 전환의 근거지를 잃고 마는 것이지요.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주민 대부분이 노령화되어 있고, 황폐해진 마을에서도 사람들의 인심은 살아 있었습니다. 사찰 교회 등 종교 시설도 그렇지만, 마을 주민들은 청년순례단을 기꺼이 환대하고, 재워주고, 먹을거리를 나눠주었습니다. 경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분도 간혹 있었지만, 우리가 만난 시골 어르신들 대부분은 순례단을 보고 누구냐고 뭐 하는 사람들이냐고 관심을 보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음료수를 건네고, 커피를 타주고, 밑반찬을 건네주었습니다. 낯선 젊은이들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 한마디만 건넬 줄 안다면 따뜻하게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길을 걷다 보면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만든 길들을 만나게 됩니다. 대개는 좋은 자연경관 중심으로 만들어졌을 뿐, 그 길 위에서는 사람도 마을도 찾기 힘듭니다. 숙박, 놀이시설들만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길에서 생명력이 생기기는 어렵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마을은 여전히 파괴되고 있었습니다만,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을이 갖는 가치를 인식하여 마을생태계 훼손을 최소화하도록 사회적 원칙과 기준을 정립하는 일이 시급해 보였습니다. 순례길이 마을과 마을을 이어 잘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길을 보는 우리 사회의 말초적인 시각을 바꾸는 것일 뿐만 아니라, 쇠락해가는 마을을 살리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nbsp;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순례 기간 만난 우리 산하 대지는 정말 눈부셨습니다. 군데군데 길이 끊기고, 난개발로 파헤쳐진 상처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지만, 그 상처들로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국토는 아름다웠습니다. 한편으로는 길 위에 서니 생명의 위기가 또렷이 보였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국토인데도 우리는 국토와 그 안에 깃든 생명을 너무 함부로 다뤄왔습니다. 사람도, 철창 안에 갇힌 개들도 개발에 밀려 모두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FONT>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런데도 우리는 마을이 처한 위기를 내 집 울타리를 높이는 방식으로 대처해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을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면 그 마을 사람들의 삶이 평화롭고 정돈되기 어렵습니다. 삶의 터전 전체가 오염되고 파괴되어 가는데 그것을 함께 회복하기보다 자신만의 성을 쌓아 그 속에서 안전하기를 바랍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요? 자기만의 공간으로 숨는다 해서 정말 나 혼자 안전할 수 있을까요?</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길을 걷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와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깊어집니다. 순례단은 이번에 평화를 가슴에 품고 걸었습니다. 과연 평화란 무엇인가요? 저는 이번 순례를 통해 평화란 아름다운 산하 대지와 그 안에 깃든 만 생명을 지키고 살리는 일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삶의 터전을 지키고, 저마다의 소중한 일상을 보호하는 일이 평화라고 생각합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평화가 제 삶 안으로 조금씩 들어올수록, 사람들이 생명과 생명의 터전인 자연을 이토록 함부로 대하는 한 평화를 자기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생명의 가치를 외면한 우리 모두에게 보낸 경고임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경고를 아직 중대한 나의 문제로 여기지 못했습니다. 생명의 위기에 대한 무감각, 생명의 터전인 마을의 방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반도가 직면한 평화 위기의 본질이자 장애물이 아닌가 합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반도 전쟁 위기 앞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힘을 키워서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인류사에서 무기로 평화를 얻은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단순한 교훈을 잊어먹는 이유는 이 평범한 진실을 자기화할 만큼 일상이 평화롭지 못하고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조직도 대부분 단기 이익에 매몰되어 일상을 희생시키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희생시킨 일상의 평화가 폭력과 전쟁에 대한 무감각, 혹은 외면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아닐까요?</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물론 한반도 평화가 생명의 위기를 직시하는 것만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4대 강국에 둘러싸인 한반도 주변 정세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매우 지혜로운 외교적· 정치적 해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하지만 외교적·정치적 해법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생명의 위기, 평화의 위기에 대한 시민적 각성이 필요합니다. 시민적 각성은 밖을 향하기 전에 우리 각자의 삶에서 반생명적인 요소를 걷어내고, 제 삶의 평화를 일궈내는 우리 각자의 노력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나로부터 생명 위기를 직시하고, 직장으로, 가족으로, 공동체로 확산하여 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평화의 씨앗은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 데로 저절로 진전될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마을과 마을길을 잇는 것과 같은 노력이 함께 시도된다면 평화는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석 위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다소 주관적인 느낌이겠지만, 마을길을 걸으며 평화의 속살을 들여다본 것 같고, 그 속살을 이제 함께 들여다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권하고 싶습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 정웅기 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 <BR>지리산 실상사 생명평화대학에서 청년들과 공부하며 새로운 사회, 길에 대한 모색을 하고 있다.</FONT>
<DIV></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Mon, 18 Dec 2017 12:07:56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핵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7</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핵전쟁을 피할 수 있을까</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작년에 슬로라이프 운동으로 유명한 쓰지 신이치 교수의 초청으로 동경에서 ‘생명평화사상’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그때 그가 교수로 있는 도쿄메이지가쿠인대학의 한 동료 교수를 소개받았다. 자그마한 여성인데 일본에서 시리아 내전 상태를 알리기 위해 세미나를 열고 사람들을 조직하는 등 동분서주한다고 했다. 그분은 직접 만든 커다란 시리아 내전 포스터를 건네주었다. 여행 옷차림으로 이동 중이어서 난감했지만, 이 분의 노고를 무시할 수 없어 포스터를 두 번이나 접어서 한국으로 가져왔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명색이 대학원에서 제3세계를 전공했다는 사람이 사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자책하던 차에 우연히 내셔널지오그래픽 TV에서 ‘이슬람 국가(IS)’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시리아 내전이 어떻게 촉발되었고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다룬 현장보고였다. 철저히 미국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영상이지만, 사태의 진행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전쟁의 참혹함이야 누구나 알 테지만, 시리아 내전만큼 처절하고 복잡한 내전은 유례가 드물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시리아 내전은 2011년 ‘아랍의 봄’에서 촉발되었다고 한다. 한 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벽에다 ‘독재자 물러가라’고 쓴 낙서가 빌미가 되었다는데, 그것은 아마도 극적인 뉴스를 만들어 내기 좋아하는 기자들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사건을 조작했다는 뜻이 아니라 특정 일화를 끄집어내 기승전결을 가진 사건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아랍의 봄’ 자체가 미국이 뒤에서 사주한 음모라는 견해도 있다. 어느 쪽이 원인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내전이 장기화하면서 엄청나게 다양한 투쟁 주체들이 생겨났고 이를 후원하는 외부 세력 또한 그만큼 많아졌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다. 피아 구별이 안 될 정도로 복잡한 전쟁 마당은 결국 미국과 러시아의 힘겨루기 사이에 ‘이슬람 국가’가 끼어 있는 구도로 진행된 모양새다. 이 내전으로 지난 6년 동안 시리아 인구의 절반이 ‘난민’으로 전락하였고 50만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집안싸움을 해결하려고 외세를 끌어들였는데 집이 그만 거덜 나 버린 꼴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시리아 내전을 보며 이런 공식을 끌어 낼 수 있다. 첫째, 먹이가 있는 곳에 내부 갈등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이용하려는 외부 세력이 존재한다. 둘째, 내부 갈등 수준이 높을수록 외세가 이를 이용하기 쉬워진다. 셋째, 외세를 한번 끌어들이면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 한 이를 다시 물리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넷째, 외세가 많이 개입할수록 내부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다섯째, 어느 한 외세가 압도적이지 않는 한 갈등은 절대 해소되지 않는다. 여섯째, 폭력적 갈등의 시간이 길어져 더는 투자로 이익이 나올 수 없음이 확실해질 때에야 갈등 봉합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불행하게도 지금 한국은 이러한 공식이 적용될 만한 가장 유리한 땅이 되어 가고 있다. 일단 남한 내부의 갈등과 남북 간 갈등이 한국전쟁 이후 최고 수준에 올랐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시리아 내전이 휴전을 모색하는 사이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은 단연 한반도이다. 북한이 개발했다고 주장하는 장거리 핵 미사일 때문이다. 이에 대응하여 남한이 독자적으로 핵을 가지거나 미국의 전술핵을 들여와야 한다는 주장이 연일 터져 나온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제멋대로 전쟁 시나리오를 써 대지만, 핵전쟁의 예측만큼 불확실한 것도 없다. 아직 인류는 핵을 가지고 싸워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는 패배가 확실한 상태에서 종지부를 찍는 의미로 핵폭탄을 썼을 뿐 핵전쟁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핵전쟁이 벌어지면 초장에 전쟁이 끝나리라 예측하지만, 내가 보기엔 절대 그렇지 않다. 핵폭탄으로도 잠재울 수 없는 내부 갈등이 있기 때문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일단 남한 땅에는 1000년 동안 지속되어 온 호남과 영남의 지역 갈등이 있고, 100년 권세를 누려 온 친일파 문제와 70년 된 분단 갈등이 있다. 전쟁이 벌어지면 남쪽은 우파와 좌파, 자주파로 나누어진 위에 지역 및 종교 간 갈등이 더해지고 여기에 외세까지 개입하여 매우 복잡한 분파가 만들어질 것이다. 북한 역시 일당독재라지만, 드러나지 않은 다양한 분파들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시리아도 처음엔 독재자 ‘바사르 알 아사드’에 대항하는 반독재 세력만 있었으나 외세가 개입하면서 수많은 분파가 생겨나 나중엔 누가 누구를 반대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난 전쟁과 집회 시위에서 보여 준 한국인의 기질로 보아 시리아 내전의 잔인함 정도는 애들 장난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방사능에 오염된 상태에서 벌이는 전쟁이므로 이판사판으로 벌이는 말기적 증세가 많이 나타날 것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추측만으로도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다. 전쟁을 준비하고 예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전쟁이 누구에게 이익이 가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전쟁이 가까워졌다면 지난 70년간 누려 왔던 분단에 의한 이익이 점차 줄어들어 간다는 뜻이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동시에 꺼낸 ‘전쟁’과 ‘FTA 재협상’ 카드는 전쟁을 해야 할 만큼 경제가 어려워졌다는 고백이다. 북이 핵미사일에 집착하는 까닭도 미국의 반응을 끌어내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북의 경제가 재래식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만약 이 판단이 옳다면 전쟁을 피하는 해법은 나온 셈이다. 미국과 북한이 상호불가침조약(북미평화협정)을 맺고 그 대신 북은 핵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 경우 미국은 북미 대결에서 얻는 이익이 줄어들기 때문에 남한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FTA에서 미국에 대폭 양보할 수밖에 없다. 이 그림은 전쟁을 피하기는 하지만 남한 민중의 희생이 너무도 큰 데다 대미종속이 더욱 심화하고 만다. 그래도 이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핵을 가진 북과 어떤 의미 있는 대화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다면 남한의 ‘멕시코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겠지만, 이는 비핵국가 북한과 경제협력을 하게 하는 압박 요인이 될 것이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전쟁불사론’이나 ‘핵무장론’ 같은 무책임한 발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한반도의 전쟁은 지금까지 인류가 겪은 모든 전쟁을 뛰어넘을 정도로 참혹할 수 있다. 한국은 FTA를 미끼로 미국이 북과 평화협정을 맺도록 유도해야 한다. 미국과의 불리한 경제협정이 국내 정치의 불안 요소가 되겠지만, 이는 중국과 북한, 러시아와의 경제 교류로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상황이 아무리 어렵고 막막해 보여도 평화를 위한 의지만은 한순간도 놓아서는 안 된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바탕>경향신문에 실린 글을 고쳐 실었습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바탕></FONT>&nbsp;</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 황대권 생명평화마을 대표<BR>전남 영광에서 농부로 살며 평화로운 삶과 생명의 가치를 품고, 생명평화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FONT></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Tue, 07 Nov 2017 16:50:5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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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삶과 인드라망] 도려내고 제거하는 변화에서 함께 바꿔 나가는 변화로</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6</link>
<description><![CDATA[
<DIV><FONT size=3 face=돋움><STRONG>도려내고 제거하는 변화에서 함께 바꿔 나가는 변화로</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적폐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을 의미합니다. 폐단이라 하면, 어떤 일이나 행동에서 나타나는 옳지 못한 경향이나 해로운 현상을 일컫습니다. 이 안에는 분리, 배제, 단죄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모든 행위가 다 옳을 수는 없고, 각자가 지닌 가치에 따라 그 행위에 대해 평가를 달리할 수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나 세력을 적폐라고 이름 붙이고 도려내고 제거하는 방법에는, 갈등과 싸움이 전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법(률)이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나 경향을 벌해서 없애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은 틀림없습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요즘 우리 사회에서 ‘적폐’ 또는 ‘적폐청산’이라는 말이 미디어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낯선 이 낱말이 우리 귀에 익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공공의 언어로 적폐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 때인 걸로 압니다. 지난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 박 전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오랜 세월 사회 곳곳에 누적된 적폐를 개혁하겠다’라고 하면서 쓰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정치권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말인 셈입니다. 과거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만들어 버린 경험이 잘 말해주듯, ‘적폐청산’ 또한 정치적인 언어로의 성격이 강해지면서 또 다른 적폐를 쌓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적폐청산을 외치는 우리 마음속에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암 덩어리)을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허상이 함께 자라납니다. 적폐의 등장 배경에는 이처럼 ‘다른 이’를 겁주고 길들여서 질서를 잡겠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언어가 함의하고 있는 것</STRONG><BR>언어는 그 나라의 현재를 반영하는 척도입니다. 언어에는 정치&#8228;사회성이 함의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적폐라는 표현은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이편과 저편, 우리 편과 다른 편, 옳고 그름이라는 구분 짓기를 끊임없이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적폐는 또 다른 적폐를 낳으며 되풀이됩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리고 적폐라는 낯선 낱말은, 보통 사람들과 적폐 사이에 기나긴 거리감을 주기도 합니다. 적폐청산은 나 자신, 나아가 우리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언어가 되게 하는 경향이 커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상에서 언어를 고르는 일에 신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그 해결 방법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적폐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표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불교에서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저마다 공동으로 선악의 업을 짓고 공동으로 고락(苦樂)의 인과응보를 받는 일’을 의미하는 ‘공업(共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나 역시도 문제를 일으킨 데 책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반면, 적폐는 누군가를 분리, 희생시킴으로써 사람들을 결집하는 효과로 쓰이는데, 이는 그 책임으로부터 나 자신은 떼어놓는 것입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습관화되거나 관행화된 어떤 것이 따지고 보면 적폐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개인을 놓고 보면 선입견이나 편견 등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유로워져야 하고, 사회로 보면 좀 더 살기 좋은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인 셈이지요.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래서 불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적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 안의 씨앗이 잘 자라거나 조금 덜 자랐을 뿐입니다. 이 씨앗이 잘 자랐다면 모든 존재-요소가 거기에 이바지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공동의 선악과 고락으로 맺어진 ‘공업’인 셈이지요. 이를 전제로 두고 이야기한다면 지금의 사회 상황을 다른 관점으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적폐 새로운 적폐를 낳다</STRONG><BR>적폐로 인한 갈등은 우리 사회 안팎으로 다양하게 있습니다. 나는 또는 우리는 빠져 있는 적폐청산은 갈등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적폐로 지목된 쪽에서 ‘그러는 너(희)는 깨끗하냐’는 식으로 버티며 힘 싸움으로 전개되어 진흙탕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제3자인 국민들 눈에는 정치 혐오만 남습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최근 ‘언론 적폐청산’, ‘언론 정상화’를 요구하며 공영방송이 동시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10여 년간 켜켜이 쌓인 언론 적폐를 청산하고 언론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에 들어간 것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영방송의 사장단 임명과 관련해 벌어지는 갈등은 여러 갈래로 편을 나누며 전개됩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는 한편이라고 해도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견고하지 않은 공동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기존 공동체의 제도가 민주적이고, 공동체성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면, 조건이 바뀌어도 공동체 외부에서 쉽게 사람이 들어오거나 다양한 갈래로 편이 나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튼튼하지 않은 현재의 공동체는 이편과 저편으로 나뉘고, 서로를 적폐로 바라보게끔 하는 상황을 쉽게 만들었습니다.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모인 구성원 사이에서 새로운 적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런 점에서 ‘적폐청산’은 언어 선택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한, 선과 악을 나눠 어느 한쪽을 제거하겠다는, 근대 이후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생각의 틀에 갇혀 있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적폐 청산이, 모두가 바뀌어 가자는 공동체 운동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인 셈입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있는 그대로 바라보다</STRONG><BR>우리는 그간 적지 않은 세월을 이편과 저편으로 구분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런 대립과 갈등의 순간은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개개의 마음속에서도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좋지 않은 쪽으로 마음이 움직일 때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불교적 관점으로 갈등을 해결한다고 할 때, 그것은 모두가 성장하는 방향-화쟁적으로 문제를 풀어나가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역시나 실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힘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는 모두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저마다의 씨앗을 품고 나온 자유롭고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 나의 생명이 평화롭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생명 또한 평화롭고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외따로이 떨어져 살 수 없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서 각자가 지닌 마음의 씨앗에 생명평화의 물을 계속해서 주어야 합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사무처</FONT></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Wed, 18 Oct 2017 16:56:2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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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삶과 인드라망] ‘바람’과 ‘기대’가 옅어지는 삶</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5</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바람’과 ‘기대’가 옅어지는 삶</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이를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다가 불현듯 내 나이가 정확히 몇 살이지 하고 헤아려 보다가 놀랐던 적이 있다. 스스로의 몸가짐에 더욱더 신중해져야 할 적지 않은 나이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나이가 먹어가면서 내 스스로에게 대견해지는 지점이 있다면 오랜 세월 내 삶을 꾸려 가는데 큰 버팀목이 되어 왔던 ‘기대’나 ‘바람’이 많이 옅어져 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시시때때로 변해가며 내 가슴속에서 자리했던 수많은 바람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사람과 일에 대한 기대가 더 이상 내 삶을 가꿔가는데 큰 동력으로 자리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되지는 않지만 ‘기대’를 가지고 사람을 대하다 보면 그 사람의 처지와 형편은 제대로 살피지 않고 상대를 내 멋대로 규정지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일과 관련한 부분에서도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에 기초해서 일을 대할 때 분명 추진력이 크게 형성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과정보다는 결과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성공과 실패의 논리에 매몰되어 지금 현재. 매 순간순간 파도처럼 다가오는 日常이 주는 의미와 소중함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놓치며 살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무수한 생을 거쳐 오면서 더욱 단단해져 본능처럼 내 몸 깊숙이 자리한‘기대와 바람’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내려놓기 위해 구체적으로 시도했던 것 중 하나가 귀정사의 일지(日誌)를 쓰는 것이었다.&nbsp; <BR>대부분의 시간이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산중 작은 절에서의 하루는 큰 변화 없이 단조롭고, 대동소이한 일의 반복이다. 그런 소소한 일상의 흐름 속에서 미미한 파동 하나라도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 안으로 가져와 살피며 그 안에 담긴 새로운 풍경과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싶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 과정을 굳이 글쓰기를 통해서 해 보려고 했던 것은 아무래도 글로 표현하려면 한 사안이 지닌 내용을 이해하는 데 있어 내 느낌과 감성에 기반을 둔 표피적인 이해가 아니라 더욱 세심한 관찰과 이해를 위한 고심을 하여야 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람과 사안(事案)에 대한 신중한 태도가 새로운 나의 습(習)으로 정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덤으로 평소 생각의 흐름이 중구난방이어서, 어떤 사안에 대해 조리 있게 파악하는 것이 서툰 내가 지닌 문제도 풀어 보고 싶었다.&nbsp;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매년 귀정사에 오셔서 철야기도를 하시는 제주도 보살님들이 계시다. 20여 년 전 정신적 육체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을 때 3년 정도 제주도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인연이 된 분들이다. 그 후 귀정사에 건축불사와 범종불사(佛事)등이 펼쳐지면 먼 곳에서 큰 도움을 주곤 하셨다. 개인적으로나 귀정사의 입장에서나 이래저래 아주 각별한 보살님들이다. 모임을 구성해서 매월 1번씩 자체적으로 기도 모임도 하고, 두 달에 한 번 정도는 육지에 있는 절을 찾아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한다. 이분들의 기도에 집중하는 힘과 인내력은 절집에 오래 살아온 나로서도 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어느 해, 철야 기도를 마치고 난 다음 날 아침 내 방에서 보살님들과 차 한 잔 나누며 얼굴을 마주했다. 모임을 이끄시는 노(老)보살님이 환하게 웃으시며,<BR>“우리 모임 식구들이 대체로 잘 되고 있어요. 누구의 아들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누구 남편의 사업은 어려웠던 고비를 넘기고 요즘은 잘 풀리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기도를 잘 들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보살님을 가르치며 “저 보살 딸이 오는 11월에 중요한 시험이 있다고 해요. 특별히 축원 좀 해 주세요.”라는 이야기를 건네셨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부탁을 받으면 나 스스로 좀 어색하고 편치가 않지만, 예전부터 비슷한 부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라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편한 관계여서 평소 마음속에 걸려 있던 부분을 말씀드렸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보살님들처럼 기도를 열심히 하는&nbsp;분들은 절집에 오래 살았지만 참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런 개인의 바람과 기대에 기초한 기도는 우리의 소중한 스승인 부처님을 친근한 우애(友愛)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적의(敵意)로 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옛 스승님들이 가르치신 기도는 바라는 바가 잘 이루어지는&nbsp;‘소원성취’식 기도가 아니라, 스스로 바라는 바, 내 고집하는 바가 점차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기도의 복(福)이고 가피력(加被力)이라고 생각합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사실 절에 다니는 대부분의 보살님도 기도하며 기원하는 바가 대동소이하다. 더 안타까운 것은 신도들을 이끄는 사찰이 앞장서서 그렇게 조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그래서 입시철만 되면 많은 절에 입시 특별기도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리고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절에는 대목장 선 것처럼 사람들로 붐빈다. 절집에서 벌어지는 이런 기이한 일들이 긴 세월 이어져 온 일이라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BR>개인이든 집단이든 오랜 세월 몸에 밴 관행과 생각을 낯설고 희미하게 만드는 노력은 그 변화가 눈에 띄지 않게 더디지만, 시도 자체가 항상 작은 깨달음과 즐거움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스승님을 적의로 대하는 태도에서 벗어나는 길이지 않을까 싶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글_ 김중묵 인드라망수련원장<BR>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해결 하려는 열정을 갖고 수련원과 사회연대쉼터 인드라망에서 활동하고 있다. </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Tue, 05 Sep 2017 18:04:0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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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4</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대성당’은 소통의 신비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이 책 읽어주기 자원봉사를 해온 맹인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난생 처음으로 맹인을 직접 마주하게 된 남편은 몇 마디 피상적인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면서 지루함을 느낀다. 식사 후에 아내는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남편과 맹인 둘이 남게 된다. 특별히 더 나눌 이야기도 없고 해서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데, 화면에는 유럽의 유명한 대성당들이 하나씩 소개되고 있다. 맹인은 그 장면들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주인공은 몇 마디 말로 묘사해보지만, 스스로 신통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 미안해한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에 맹인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두꺼운 종이와 펜을 가져다가 함께 그려보자는 것이다. 맹인은 주인공의 손 위에 자기의 손을 얹은 다음, 화면에 보이는 성당을 그리도록 요구한다. 주인공이 그림을 그려나가자 맹인은 매우 흡족해하며 칭찬을 한다. 맹인은 또 한 가지 제안을 덧붙인다. 눈을 감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려보라는 것이다. 대충 그림이 완성되었을 때, 맹인은 주인공에게 이제 눈을 뜨고 한 번 보라고 한다. 그리고 물어본다. “어때요? 보고 있나요?” 하지만 주인공은 눈을 뜨지 않는다. 왠지 조금만 더 그렇게 있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그가 눈을 감은 채 대답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사람과 사람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미디어의 혁신 속에서 소통의 회로는 날로 팽창한다. 트위터의 팔로잉과 팔로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의 친구들은 계속 늘어난다. 지구 정반대편 사람들과 쉽게 접속하여 친구를 맺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친구들과도 친구를 맺는다. 온라인에서 생성되는 관계는 두뇌의 정보 처리 능력을 넘어서버렸다. 얼마 전에 나온 &lt;과잉 연결 시대 (Overconnected)&gt;라는 책은 사이버 네트워크의 과도한 증식이 빚어내는 문제들을 파헤치고 있다. 경제나 시스템에서 나타나는 의도하지 않을 결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생활세계에서 나타나는 부작용도 짚고 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인간들 사이의 연결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것과 상반되는 흐름이 있다. 지난해부터 일본에서 키워드로 떠오른 ‘무연(無緣)사회’가 그것이다. 사회적 관계는 물론 가족 관계마저&nbsp; 끊긴 채 고립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상황을 말한다. 그렇게 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때 아무도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는 죽음을 ‘무연사(無緣死)’라고 하는데, 일본에서 매년 3만2천 명이 그렇게 임종한단다. 지난 3월 동일본대지진이 남긴 후유증 가운데 하나도, 수십 만 명이 한 순간에 혈연, 지연, 사연(社緣)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강 건너 불구경이 아니다. 한국에도 일인(一人) 가구가 25%에 육박하고 있고, 그 증가의 기울기는 일본보다 더 가파르다. 독거노인의 급증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된다. 그러나 독거만이 무연사회의 전모는 아니다. 물리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고는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고립되어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한 휴대전화에 수많은 연락처가 있고 페이스북에 친구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중대한 곤경에 처했을 때 손을 뻗칠 사람은 없는 경우도 많다. 왕따와 괴롭힘으로 자살한 대구의 중학생에게 온라인은 매일 수십 개의 협박 문자가 날라든 통로일 뿐이었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 고통을 거의 알지 못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지금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부실해지고 있다. 삶의 현장 곳곳이 사각지대로 방치되고 그 도가니들 안에서 기괴한 폭력이 번식한다. 미디어 이벤트에 집단적으로 열광하고 가끔 정치적 함성이 광장으로 모여들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저마다 비좁은 골방에 갇혀 지내기 일쑤다. 또한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치는가에 과민하면서, 타인의 곤경에는 지극히 무심하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연결의 과잉, 관계의 결핍 시대다. 공감의 유전자는 아직 살아있을까. ‘대성당’의 주인공이 맹인과 접속한 것 같은 의외의 가능성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까. 잠시 눈을 감고 마음의 무늬를 더듬어본다. 타인에게 이르는 미지의 통로를 응시하고 싶다. </FONT></DIV>
<P align=right><FONT face=돋움>이 글은 『눌변』(문학과지성사, 2016)에 실린 글입니다.</FONT></DIV>
<P align=right><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글_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초빙교수<BR>일본 오사카대학교 객원 연구원, 서울시대안교육센터 부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학교, 사회단체, 공공기관 등에서 인문학과 문화인류학, 교육학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Fri, 04 Aug 2017 17:18:19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탈핵바람이 불어오다</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3</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탈핵바람이 불어오다</STRONG></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아름다운 지구별이 심각한 위기에 처할 가장 큰 위험으로 ‘기후변화’와 ‘핵’을 이야기한다. 2012년도 인드라망은 핵 없는 한반도를 위한 특별사업에 참여하며, 핵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핵 위험에 대해 알리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4년 제2기 11차 정기총회에서는 지속가능한 에너지로의 전환과 새로운 문명에 대한 성찰을 이루는 방편으로 ‘핵 없는 한반도를 염원하는 기도’를 1000일 동안 결의하였고, 2016년 겨울 1000일간의 기도를 마치고 내 삶 속으로 이 운동을 가져가는 서원을 저마다의 가슴에 새겼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 사회가 생명위기의 시대에 진입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핵발전이 기후변화와 미래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음도 드러난 인과관계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며 불러올 예측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위험과 재앙은 지난 4차례의 원전사고, 특히 이웃한 나라인 일본에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통해 경험한 바가 크다. 누출된 방사능이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서는 여전히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이고, 바로 이런 부분이 어떤 사고보다 핵발전소 사고를 두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사고가 난 이후의 수습이 아닌, 사고 발생의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지혜로운 생각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절실한 때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대전환’ 선언</STRONG><BR>2017년 6월 19일 0시.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원자로, 고리 1호기가 영구 정지에 들어갔다. 첫 가동을 시작한 지 40년 만이라고 한다. 이날 고리 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이를 가리켜 ‘탈핵 국가로 가는 출발’이자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가는 대전환’이라고 하였다. ‘탈원전’은 문재인 대통령의 선거 공약이기도 하였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핵발전 중심에서 탈핵 시대로 가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원자력안전위원회 대통령 직속 위원회로 승격, 준비 중인 신규원전 건설계획 전면 백지화, 원전 설계수명연장 금지, 월성1호기 가급적 빨리 폐쇄, 건설 중인 신고리 5, 6호기 사회적 합의 도출, 원전 안전기준 대폭 강화, 원전 운영의 투명성 대폭 강화, 탈핵 로드맵 빠른 시일 내 마련 등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선언은, 탈핵 에너지 전환의 의지를 강하게 밝힌 것이라고 보인다. 그동안 사회 곳곳에서 탈핵을 목 놓아 이야기했던 순간과 사람들, 그들이 흘린 눈물이 함께 떠오른다. 이런 탈원전 행보는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으로, 이제 우리가 모두 함께 꾸는 꿈이 되고 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선언은 안전하게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STRONG><BR>우리나라는 여러 기준에서 원전 밀집도가 아주 높다. 사고가 났을 때 피해를 더 많이 입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먼저 고리(부산/울산), 월성(경주), 한울(울진), 한빛(영광) 이렇게 4군데 원자력발전소에 모두 24기의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다. 전체 원자력발전소 단지 반경 30킬로미터 안에 광역자치단체 9개와 기초자치단체 28개가 밀집해 있다. 원전 밀집도 세계 1위라는 뜻이다. 미국보다 20배, 러시아보다 100배 높은 밀집도이다. 부지별(발전소별) 원전 밀집도 또한 세계 1위이다. 전 세계에는 450개 원전이 188개 부지에 있다. 단지당 원전이 2.4개가 있는 셈이다. 이는 우리나라는 4군데 발전소 단지가 ‘초대형’원전 단지라는 것을 뜻한다. 원전 주변 인구수도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고리 원전을 중심으로 둘레 30킬로미터 안에 인구수는 380만 명이다. 사람만 많은 게 아니고 주요 경제 시설들이 모여 있기까지 하다.<BR>고리 1호기를 영구 정지시킨 뒤에는 원자로를 해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해체 경험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당연히 비용도 많이 든다. 8천억-1조 원을 내다보고 있다. 여기에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는 들어 있지 않다. 방사성 폐기물을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기술이 아직 없으니 이 비용도 만만치 않다. 결국, 원자력발전소가 ‘값싼 에너지’가 아니라 ‘비싼 에너지’인 셈이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재인 대통령의 탈핵 선언은 선언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사고를 지켜본 국민의 정서로는 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원자력발전소 유지를 통해 생계 등 권력과 이익을 얻고 있는 사람들의 저항과 반대도 무시할 수 없다. 당장 고리 1호기 영구 정지를 계기로 경제신문 등은 전기요금 폭등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한수원은 경제지 등에 홍보비 명목으로 광고를 주고, 경제지 등은 한국원자력학회 등의 자료나 주장을 근거로 기사를 쓴다. 뿐만 아니라 한수원 노조, 원자력학과 등이 있는 대학의 교수 등도 생존이 달린 일이기에 탈핵에 반대 입장일 수밖에 없다. 사실 전기요금 폭등 주장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고리 1호기가 생산한 전기는 2016년 전체 발전량의 0.85%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 전기 수요가 가장 높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전력 설비 20%는 가동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찬반 힘겨루기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가 </STRONG><BR>문재인 대통령은 고리 1호기 영구 정지 이후 진행 중인 신고리 5, 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도록 했다. 나아가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를 석 달 동안 운영하기로 하였다. 신고리 5, 6호기 건설 중단 여부 등을 중립적인 시민배심원들이 결정하도록 한 셈이다. 대통령의 탈핵(탈원전) 선언으로 원전 찬반 대립이 심화하여 가는 상황에서 적절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어느 한쪽 처지에서는 양에 차지 않고 모자람이 많아 보이겠지만, 갈등하고 대립하며 싸우느라 대안이나 방향을 찾지도 못하는 것보다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본다. 당장의 건설 중단보다는 탈핵이라는 큰 흐름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지나친 갈등과 대립보다는 설득하고 유도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나라 원자력 분야는 정부의 지원 아래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다. 원자력발전소, 정부 관료, 대학, 연구소, 언론, 재벌 등 폭넓게 퍼져 있다. 이들을 에너지전환이라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현명한 대안이 필요하다. 관련 업계나 학계는 폐로 기술이나 사용 후 핵연료 처분 기술 개발에 투자하고,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대안을 함께 찾아야 할 것이다. 이런 공론의 장을 만드는 출발이 ‘공론위원회’가 되기를 바란다. </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민중가수 우창수 선생은 ‘아이들에게 생명을’이라는 노래에서 탈핵과 생명존중에 관한 이야기를 조곤조곤하지만, 진실한 문장으로 들려준다.</FONT></DIV>
<P align=center><FONT face=바탕>핵을 반대합니다&nbsp; 핵을 반대합니다&nbsp; 핵을 반대 합니다&nbsp; 아이들에게 생명을<BR>하늘을 사랑합니다&nbsp; 땅을 사랑합니다&nbsp; 풀꽃을 사랑합니다&nbsp; 나무들에게 생명을<BR>반딧불이를 구해주세요&nbsp; 고니를 구해주세요&nbsp; 펭귄을 구해주세요&nbsp; 북극곰에게 생명을<BR>당신의 힘을 주세요&nbsp; 모두의 힘을 주세요&nbsp; 마음을 다해 주세요&nbsp; 지구별에게 생명을</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새 정부가 들어서고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에 불어오는 탈핵바람이 무더운 여름철 불어오는 하늬바람만큼 상쾌하게 대한민국을 물들이기 바란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소식지 편집팀</FONT></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Fri, 04 Aug 2017 10:01:2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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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머뭇거림 없이 새로운 길을 열어야 정부도 나라도 산다</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2</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STRONG><FONT size=3 face=돋움>머뭇거림 없이 새로운 길을 열어야 정부도 나라도 산다</FONT></STRONG>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불교교리 가운데 일상적인 시민윤리로 해석해도 무방한 것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사성제(四聖締)입니다. 사성제의 고(苦)와 집(集)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멸(滅)과 도(道)는 문제의 해결(혹은 비전)과 문제 해결의 방법을 의미합니다. 두 쌍은 각기 인과관계를 이룹니다. 집이 원인이 되어 고가 발생하고(집&#10140;고), 도가 원인이 되어 멸이 발생합니다.(도&#10140;멸)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여러 노력을 기울여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치로는 알기 쉽지만, 실천하기는 만만치 않은 일입니다. 원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문제를 규정하거나, 문제 해결의 원인이 아직 제대로 지어지지 않았는데도 해결된 상태를 기대하는 오래된 습관 때문입니다. 크고 작은 문제에 부딪힐 때마다 관념으로 진단하고 헛된 기대를 하면 실패와 오류를 반복하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를 전도몽상이라 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벚꽃 대선이 끝난 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뜨겁습니다. 대통령의 탈권위적인 모습을 보며 시민들은 마치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듯 기뻐하고 뿌듯해합니다. 소탈하고 격의 없는 모습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리더십과 극명하게 비교됩니다.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국민을 대하는 태도인 듯합니다. 박 전 대통령 또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생각했을 터이지만, 국민과 눈을 맞추며 소통하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장벽을 치고 권위를 지키는 과거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나 싶습니다.</FONT>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 대통령이 보여주는 수평적 리더십은 지난 촛불시민혁명 과정에서 시민들이 만들어낸 광장민주주의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대통령도 잘못하면 처벌받아야 한다’라는 놀라운 평등의식과 탈권위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망설이는 국회와 헌법재판소까지 움직여 권력의 종지부를 찍고 말았습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애증의 상징인 아버지 박정희의 유산까지 물려받았던 박근혜 대통령이 무너짐으로써 2대를 통해 형성된, 거의 신화에 가까운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이제 그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과거와 같은 초법적 권위를 갖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탱하던 권위주의, 엘리트주의, 하향식 문제 해결 관행은 종언을 고할 것입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사성제에서 멸(滅)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道)라는 원인이 반드시 지어져야 하듯이 평등이 권위주의를 대체하고, 직접민주주의가 엘리트주의를 대체하고, 수평적 의사소통이 하향식 의사결정 방식을 대체하기까지 수많은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최소 수십 년 이상 뿌리내려온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담대한 구상과 신념도 필요하고, 기득권층의 저항도 뚫고 가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행착오도 불가피할 것입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내임기간에 결실을 거두려는 것도 과욕입니다. 아마 문재인 정부에서는 기성 질서의 문제점을 잘 드러내고, 변화되는 시대에 맞게 새로운 국가 비전을 제대로 세우는 정도만 해도 대성공일 것입니다. 대통령이 이렇게 새로운 길을 내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갈 때 시민들도 진정한 희망으로 기쁘게 함께 갈 수 있을 것입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 점에서 지난해 촛불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촛불은 탈권위적 평등의식, 민주 의식과 함께 평화라는 가치를 전면에 등장시켰습니다. 백만이 넘는 시민들이 평화로운 방식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독려하며 끝까지 저항하는 기적적인 장면을 만들어냈지요. ‘폭력’이라는 과거의 프레임은 평화의 촛불 앞에서 무력하게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어떻게 하여 세계가 놀랄만한 평화가 가능했던 것일까요? 그 원동력은 광장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문제를 다루는 태도’에서 나왔습니다. 시민들은 자신의 생활 영역을 박차고 광장에 나와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온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국가적 문제를 풀기 위해 놀라운 평등의식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과정에서는 차이의 존중이 돋보였습니다. 태극기 부대까지도 용인하는 성숙한 모습이었습니다. 광장에서는 나이, 성, 직업과 같은 기성의 질서를 뛰어넘어 각자가 존귀한 인간으로서 연대하고 소통하였습니다. 어린 고등학생들의 의견에 어른들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광장에는 새로운 사회에 필요한 전환의 에너지들이 마음껏 분출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기성의 질서를 대체할 희망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 대통령은 당선되면 촛불 정신을 받아 안겠다고 여러 번 강조했습니다. 전환의 징후를 읽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광장에 모인 촛불의 힘에 대한 단순한 추종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촛불의 함의를 제대로 읽는 것입니다. 탈권위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선공후사의 자세로 차이를 존중하며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다루어 가야 하고, 이렇게 문제를 다루는 사회적 태도를 성숙시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 각 영역에서 실질적인 전환의 길을 하나하나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재인 정부가 풀어가야 할 국정과제들은 대부분 해묵은 것들입니다. 기존의 시스템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들이므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작은 조직에서조차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관성을 벗어나기 쉽지 않은 법인데, 국가적인 제도와 구조, 사람 모두가 바뀌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국민 또한 대통령 하나 바꾼다고 해서 기존의 질서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끈기 있게 변화를 주문하고 지켜봐야 합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대통령과 정부가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길을 내는가에 성패가 달려 있습니다. 특히 견해가 다른 이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이들과의 소통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들은 어차피 반대할 것이라 예단하고, 아예 소통조차 않았던 이전 정부의 전철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계는 한계대로 인정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대로 먼저 사과하고, 상대의 견해를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내 편으로부터 욕먹을 각오도 기꺼이 해야 합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렇게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는 한 저성장과 양극화, 북핵과 한반도 평화, 민주주의 심화 등 안팎으로 산적한 현안들은 해결되기 어렵습니다. 기존과 같은 차원,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다뤄서는 비슷한 결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임기 초에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으면, 제대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적당히 지지자들을 위무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것입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문재인 정부는 달리는 호랑이 등에 타고 있습니다. 한눈팔고 머뭇거릴 틈이 없습니다. ‘적대적 공존’이라는 과거로 회귀하고픈 안팎의 유혹과 관행을 물리치고,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합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와 기대가 있습니다. 임기 초반 작은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내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든 준엄한 촛불의 준엄한 명령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오솔길이라도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전환의 과제들은 그 길 위에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 정웅기 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 <BR>지리산 실상사 생명평화대학에서 청년들과 공부하며 새로운 사회, 길에 대한 모색을 하고 있다.</FONT> 
<DIV></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Fri, 09 Jun 2017 16:17:53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모든 변화의 첫 단추, 선거법 개혁</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1</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모든 변화의 첫 단추, 선거법 개혁</STRONG></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대통령 선거가 한참이다. 곧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고 한들 ‘헬조선’으로 요약되는 현실이 개선될까?</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렇게 낙관하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아무리 개혁적인 사람이 된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기득권 구조는 견고하다. 당장 국회에서 법률 하나 통과시키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닥칠 것이다. 작년 12월 대통령 탄핵소추 결의안이 통과된 이후에 국회 상황을 보면,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법률을 통과시킨다고 수없이 약속했지만, 그 법률들은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이런 상황은 대통령이 바뀌어도 계속될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지금 대한민국의 국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숱한 우리 삶의 문제들을 풀어야 하지만, 국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풀기가 어렵다. 미세먼지를 줄이려고 해도, 위험한 원전을 폐쇄해나가려고 해도, 최저임금을 올리고 농민들에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려고 해도, 국회에서 법률과 예산이 통과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일시적이고 약간의 변화만 가능할 뿐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국회라는 판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판을 바꾸려면 판을 구성하는 규칙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제도를 바꿔야 국회판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실제로 뉴질랜드는 1993년에 국민투표까지 거쳐서 선거제도를 바꿨다. 지역구에서 1등을 한 후보만 당선이 되고, 2등, 3등, 4등을 한 후보를 찍은 표는 죽은 표(사표)가 되는 불공정한 선거제도를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꾼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연동형 비례대표제’란 정당이 얻은 득표율대로 전체 국회 의석을 나누는 제도이다. 30% 얻은 정당은 30% 의석을 가져가고, 10% 얻은 정당도 10% 의석을 가져간다. 1등만 되는 것이 아니라, 2등, 3등, 4등 정당을 찍은 표도, 그 표만큼 의미를 가진다. 사표를 최소화하고 표의 가치를 동등하게 하는 선거제도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렇게 선거제도를 바꿨더니, 뉴질랜드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1980년대에 신자유주의 모범국가로 불리며 불평등이 심해지던 뉴질랜드 사회에서, 최저임금이 오르고 임대주택이 개선되며 민영화가 중단되고 가난한 가정에 ‘가족수당’이 지급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선거제도 개혁의 결과였다. 정당득표율대로 전체 국회 의석을 나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더니, 뉴질랜드 국회에 다양한 정당들이 진출했다. 4등, 5등을 한 정당도 자기가 얻은 표만큼 의석을 가져갔다. 선거를 하면 1등을 한 정당도 40% 내외의 표를 얻을 뿐이었다. 얻은 표만큼 의석을 가져가니, 1등을 한 정당도 국회에서 혼자 과반수를 차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여러 정당이 정책을 놓고 협상해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정치가 이뤄졌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유권자들도 이제는 정당의 정책을 보고 투표를 했다. 그러니 아무리 보수적인 정당이라고 해도, 시민들 삶의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표를 얻을 수가 없었다. 보수정당도 표를 얻기 위해서는 복지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약자들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래서 뉴질랜드 사회는 큰 방향전환을 하게 되었다. 보다 평등하면서도 인간답게 사는 방향으로 전환을 한 것이다. 이런 뉴질랜드의 사례는 시사하는 것이 많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가 알고 있는 복지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정당득표율대로 국회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제도를 갖고 있다. 지금은 우리가 부러워하는 나라들이 되었지만, 스웨덴이나 덴마크 같은 나라들이 본래부터 ‘삶의 질’이 높았던 것은 아니다. 그 나라의 정치가 지금의 모습을 만든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한때는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이민 가던 스웨덴, 독일과의 전쟁에서 좋은 땅을 빼앗기고 힘들게 살아가던 나라 덴마크가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된 것은 ‘좋은 정치’ 덕분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를 만든 것이 바로 유권자들의 표심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이다. 덴마크나 스웨덴 모두 정당이 얻은 득표율대로 전체 국회 의석을 나누는 선거제도를 갖고 있다. 독일, 핀란드, 노르웨이,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들도 마찬가지이다. 나라마다 구체적인 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공통점은 정당이 얻은 득표율대로 전체 의석을 배분한다는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런데 한국의 선거제도는 이렇지 않다. 300명의 국회의원 중에서 253명의 지역구에서 1등을 하면 당선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소선거구제)로 뽑는다. 300명 중에 겨우 47명만 비례대표라고 해서 정당득표율대로 나누지만,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그래서 한국의 역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를 보면 거대정당들이 실제 득표에 비해 과도한 의석을 차지하는 현상이 반복됐다. 2004년, 2008년, 2012년에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득표를 얻은 정당들이 국회에서 단독으로 과반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4대강 사업이 강행되었고, 국정농단이 벌어졌다. 작년 4월 총선의 결과도 정당득표율과 의석비율이 일치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2개 정당이 얻은 득표율에 비해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선거를 반복하다 보니, 국회의원들이 점점 정치 특권계급으로 되고 있다. 작년 4월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평균연령은 55.5세에 달했다. 20대, 30대 당선자는 전체 300명 국회의원 중 3명에 불과했다. 국회의원 평균재산은 40억 원에 달했다.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17%에 불과하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것은 현재의 선거제도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거대정당에 들어가서 당선 가능한 지역구에서 공천을 받아 1등을 해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선거제도이다. 그런데 청년이 거대정당에서 당선 가능한 지역구에 공천을 받을 수 있는가? 여성들, 장애인들이 그런 곳에 공천을 받기 쉬울까? 그래서 대한민국의 국회는 정치특권계급처럼 되었다. 과도한 특권을 누리면서 정작 필요한 일에는 집중하지 않는 국회가 된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래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것이 시작이다. 그와 함께 국회의 특권은 없애고, 국회의원 숫자는 오히려 늘려야 한다. 지금 5,744억 원의 예산을 쓰고 있는 국회에는 쓸데없는 낭비 요인들이 너무 많다. 국회의원이 받는 급여는 수당을 포함하면 1억 4천만 원이 넘고, 국회의원 1인당 7명+2명(인턴)의 보좌진을 두고 있다. 이런 과도한 급여와 보좌진 숫자를 줄인다면, 국회의원 숫자는 오히려 360명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 인구가 8,000만 명인 독일의 하원의원 숫자가 630명에 달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늘어나는 국회 의석은 전부 비례대표로 하고, 정당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한다면 대한민국 정치는 혁명적으로 바뀔 것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국회의원 선거만이 문제가 아니다. 내년 6월에 치러질 지방선거제도도 바꿔야 한다. 국회와 똑같이 표심이 왜곡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런 생각에서 200여 개에 달하는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lt;민의를 반영하는 선거법 개혁 공동행동&gt;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대선이 끝난 직후에는 더욱 집중해서 활동할 예정이다. 국회를 포위해서라도 반드시 선거법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계획이다. 캠페인을 위한 홈페이지(</FONT><A href="http://www.changeelection.net/"><FONT face=돋움>www.changeelection.net</FONT></A><FONT face=돋움>)도 열었다. 선거법 개혁에 대한 대선후보들과 국회의원들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2015년 2월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꿀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민들의 여론이다. 시민들의 여론이 만들어진다면, 국회도 선거법 개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촛불 시민혁명을 완성하는 길이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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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BR>변호사였지만, 10년째 휴업중입니다. 2011년 가을부터 5년간 녹색당 사무처장, 공동운영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지금은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고, 득표율대로 의석을 배분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전면개혁하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FONT>
<DIV></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Wed, 10 May 2017 15:05:23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세월호 희망으로 피어나다</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50</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세월호 희망으로 피어나다</STRONG></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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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STRONG><FONT size=3 face=돋움><IMG src="http://www.indramang.org/data/cheditor/1704/__copy1.jpg"></FONT></STR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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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세월호.<BR>녹슬고, 찌그러진 모습으로 1,073일 만에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우리의 슬픔은 깊어 있습니다. 차가운 바다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렸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아직도 세월호를 생각하면 슬픔과 비극이 떠오릅니다. 며칠 후면 세월호 사고 3주기가 됩니다. 이제는 삼 년 탈상하는 마음으로 그 슬픔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벗어남은 그 사건을 잊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월호의 슬픔과 절망을 넘어 희망으로 가야 합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세월호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던 아픔이 만든 참사였습니다. 생명질서를 벗어나 생명보다 물질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안전 관련 규제 완화, 과적된 화물, 비정규직 등 세월호 안에는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병폐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고를 대처하는 정부기관의 태도를 보면서,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이기적인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월호로 인해 아파하는 희생자, 생존자, 유가족들에 대한 태도는 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기보다는 정치적·사회적 이유로 인해 갈등을 만들고, 유가족들이 광화문 거리로 나서게 했습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세월호 참사가 이전의 사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온 국민이 세월호가 바닷속으로 기울어져 가라앉는 모습을 TV 생중계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충격과 아픔은 더 컸습니다. 거리 곳곳에 노란 리본을 매고, 옷이나 가방에 달고 다니며, 남의 일이 아니라 이미 우리 가족, 친구, 이웃의 일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인드라망에서는 세월호 참사 이후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 사회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이루고자, 개인의 성찰로부터 시작해 사회적 전환의 몸짓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리산 권역에서는 지리산 세월호천일기도를 실상사와 산내마을, 지리산 종교시민사회단체들이 힘을 모아 진행하고 있고, 광주전남지역에서는 일요일마다 광주 전역을 순례하는 빛고을천일순례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드라망 소식지에서는 세월호에 대한 마음을 다른 이에게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세월호 이어 쓰는 편지’를 연재 중입니다. 세월호가 남긴 교훈을 잊지 않고, 우리의 삶과 이 사회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습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세월호 사고의 3주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인드라망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세월호 이후의 세상을 만들어가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젠 그만 잊자고 이야기합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달라진 것이 없고, 피로감이 높아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세월호가 인양되었듯이, 생명과 안전이 우선인 사회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그 뜻을 모으는데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작년 8월 진행된 ‘세월호 희망의 길 찾기 워크숍’에서는 세월호가 출발했던 인천항을 시작점으로, 서해안 길을 따라 팽목항까지 걸으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서해안 마을 순례길’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한국의 산티아고 길’처럼 성찰과 전환을 상징하는 길이 만들어지고, 잊지 않겠다는 나와 그만 잊어버리자는 네가 함께 손잡고 그 길을 걸을 수 있다면, 그때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순례길 조성을 위한 첫 걸음으로 순천사랑어린배움터의 중학교 1학년 9명의 친구들이 ‘첫걸음 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 어린 친구들이 작년 9월 5일(월)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45일간 [인천여객터미널-시흥-안산-화성-평택-아산-태안-서산-보령-서천-군산-부안(새만금)-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해남-진도(팽목항)]까지 700km를 걸었습니다. 아이들의 걷기를 응원하며 도왔던 어른들을 포함하여 1백여 명이 넘는 이들이 순례를 마치는 날 팽목항 인근 ‘기억의 숲’에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축하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엇보다 부쩍 성장한 아이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이들은 마을회관, 경로당, 마을 종교시설 등에서 잠을 자고 쉬면서 지역주민들이 내밀어 준 손을 잡고 자립과 환대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순례를 통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힘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날마다 걷고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커진 배움이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에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제 우리가 나서서 이 순례길을 제대로 만들고 함께 걸을 차례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순례길이 세월호를 추모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전반의 성찰과 전환을 염원하는 시민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길로 만들고자 합니다. 삶에 지치고 힘겨워하는 이들 누구라도 훌쩍 배낭 하나 메고 떠날 수 있는 위안의 순례길, 달라진 세상을 위해 일하다 지친 이들이 쉴 수 있는 휴식의 순례길,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은 이들에게 치유의 순례길이 되었으면 합니다. 세월호가 남기고 간 슬픔과 고통이 희망의 꽃으로 잘 피어날 수 있도록, 생명평화를 삶으로 꿈으로 가꾸어온 분들이 기꺼이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 <STRONG>세월호 희망의 길을 걷는 사람들 누리집 </STRONG><BR><FONT color=#000000>&nbsp;&nbsp; </FONT><A href="http://www.hopeway.kr/"><FONT color=#000000>www.hopeway.kr</FONT></A><BR><FONT color=#000000>&nbsp;&nbsp; </FONT><A href="http://www.facebook.com/416hope"><FONT color=#000000>www.facebook.com/416hope</FONT></A></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DIV>
<DIV>글_ 사무처</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Mon, 03 Apr 2017 16:54:14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사드 말고 ‘평화’</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49</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사드 말고 ‘평화’</STRONG></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허리 굽은 할매는 지팡이를 짚었고, 다리가 불편한 할배는 의자에 앉은 채 롯데골프장에서 물건을 싣고 나오는 트레일러를 막아섭니다. 30여 명의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할매, 할배들은 롯데골프장 정문으로 향하는 길목에 한두 줄로 늘어섰습니다. 곧 경찰차 10대가 배치됩니다. 롯데가 롯데골프장을 사드배치 제공지로 결정한다는 국방부발 언론보도가 잇따르고 롯데골프장에서 골프 관련 물품들이 실려 나오니, 다급해진 주민들은 몸으로 트럭 앞을 가로막습니다. <BR>“사드가 들어온다는 날부터 집에 있으면 가슴이 벌떡거려서 촛불집회에라도 나와야 한다”며 200여 일 넘게 촛불을 들어온 할매, 할배들은 또다시 벌떡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겨울바람보다 더 매서운 ‘안보 프레임’을 맨몸으로 견뎌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났다 생각했는데 너무 일찍 안심했나 봅니다. 칼바람도 가만히 있지 않고 불어댑니다.&nbsp; <BR>하루 전 날 비 오는 수요일, 소성리 평화집회를 다녀온 터라 사진 속 할매, 할배들의 굽은 허리와 ‘사드반대’ 머리띠에 가슴이 아려옵니다. <BR>데자뷰 deja vu! 송전탑반대운동을 벌이던 밀양, 청도 할매, 할배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대한민국은 국가, 국익, 안보를 내세워 선거 때마다 ‘그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국민을 고통 속에 밀어 넣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nbsp;&nbsp;&nbsp; <BR>북한 준중거리 미사일에 대비하고, 미국안보를 위해 배치되는 사드(종말단계고고도지역방어체계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THAAD)가 엉뚱하게도 참외와 포도로 유명한 성주, 김천 주민들의 삶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은 지 200일이 넘었습니다. <BR>롯데골프장 바로 곁에는 평화의 성자라 불리는 원불교 2대종법사 정산종사 생가입니다.</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평화의 성자 정산종사 ‘사드’에 휩싸이다</STRONG><BR>빗발이 굵어지면서 오후2시 수요집회를 준비하는 소성리 주민들의 분주함을 뒤로하고 정산종사 생가로 향했습니다. 예의 정갈하고 소박한 집 마당에 들어서니 잠시 세상의 분주함에 막이 드리웁니다. 정산종사와 동생 주산종사 형제 스승님께 인사를 드리고 잠시 마음을 모읍니다. 평화가 살짝이 단전에 머물다 갑니다. <BR>세계가 하나의 큰 집안과 하나의 큰 가족과 하나의 큰 살림임을 밝혀주시며 평화 안락한 하나의 세계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즐기자고 하셨던 정산종사님의 삼동윤리 사상은 편견과 폭력이 인류 전체의 평화를 위협하는 이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사상입니다. 종교 간 화합과 상생, 평화로 화하는 세상에 대한 법문을 내놓은 원불교 2대종법사 정산 송규종사는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뒤를 이어 교법 체계를 완성하고, 원불교를 우뚝 세운 성자입니다. 경상도 출신 정산종사가 꿈에 그리던 스승을 찾아 전라도 땅까지 찾아가기 까지 태어나고, 성장하신 성자의 구도지가 바로 초전면 소성리입니다. 성주 달마산은 성자의 구도길이었고, 그 길을 넘어서면 어느새 김천에 다다릅니다. 성주-김천 구도길은 원불교의 자산을 넘어 세계종교문화자산입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구도길은 지금도 롯데 골프장 측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사드포대가 설치되면 미군 부대 시설로 접근조차 불가능한 길이 됩니다.&nbsp;&nbsp; <BR>고백하건대 성주성지를 지키겠다는 종교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원불교 사드반대 운동은 어느덧 세상의 평화에 간절히 다가가 있습니다. 원불교 교법의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가르치신 스승님은 세상일에 무심했던 제자들을 이렇게 일떠세우나봅니다. 어느덧 원불교는 ‘평화’의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습니다. </FONT>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사드배치가 설마 구두약속?</STRONG><BR>사드가 들어온다는 것은 치외법권 지역인 외국군 즉 미군 부대가 하나 더 생긴다는 말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미국본토 방어용 사드배치를 위해 토지를 내어주고, 수백억의 운영비를 분담하고, 무엇보다 중국의 자위권 행사로 주권이 심대히 침해되는 사안이므로 적어도 양국 간 조약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국회비준동의 또한 필요하고요. 꼼꼼한 환경영향평가가 이뤄져야 함은 물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한미 양국 실무 구두협의만 있었던 사드가 어떻게 한-미 양국 간 협상으로 둔갑하여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는지 상식적인 이해가 불가합니다.<BR>현재까지 드러난 바로는 사드 배치 관련 한미 간 ‘합의’라는 것은 한국 국방부 정책기획관과 주한미군 기획참모부장이 서명한 ‘한미 공동실무단 운용결과 보고서’뿐입니다. 그런데 이는 적법한 권한을 가진 자가 서명한 한미 간 조약이 아니며, 한미 국방부 간의 기관 간 약정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BR>‘양국간 협의서가 존재하느냐?’는 질의에 국방부 법무 담당자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습니다. 국회 국방위소속 국회의원들의 거듭되는 협약서 열람요청에도 국방부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합니다. <BR>최소한의 법적 요건도 갖추지 못한 정체불명의 한미 합의에 의거해서 미국이 사드 배치 권리를 갖고 한국이 토지 공여와 기반시설 제공 및 운영유지비 지원 등의 의무를 지는 것은 불법으로 원천무효입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실무협의는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다고 합니다. <BR>국방부는 이 모든 것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했다고 주장합니다. 한미방위조약에 의하면 실무자 간의 협의와 미국의 요청에 의하면 미군 부대도 실무협의 수준에서 내어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철저한 불평등조약임을 자인한 셈입니다. 실체 없는 사드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이 순리입니다.</FONT></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STRONG>다시, 골프장 앞에 선 소성리 주민들 <BR></STRONG>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소성리 주민들은 또다시 10년 만에 골프장 앞을 막아섰습니다. 카트 등 골프 장비를 실은 트럭이 나가지 못하게 온몸으로 막으며 소성리 할매, 할배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BR>10년 전 골프장 반대투쟁에 나섰던 주민들의 허리는 10년 전보다 더 굽었고, 다리는 더 아파옵니다. 10년 만에 ‘골프장 반대’ 머리띠는 ‘사드반대’로 바뀌었고, 골프장 문 여는 것을 막아섰던 주민들은 이제 행여나 롯데가 골프장 문을 닫을까 봐 노심초사입니다. 골프장보다 더한 전쟁 무기 가득한 미군 부대라는 괴물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nbsp;&nbsp; <BR>사드로는 북핵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드는 길이와 폭이 짧고, 좁은 한반도에는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무기체계입니다. 사드에 대해 중국이 분노하는 이유는 X밴드 레이더 때문입니다. 이 레이더는 중국의 군사정보를 훤히 들여다보는 신묘한 천리안입니다.<BR>중국의 경제보복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드배치가 현실화되면 경제보복은 물론이거니와 군사보복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구한말 열강에 둘러싸인 조선의 운명과 같다고나 할까요? 세계에서 미국만이 우방일 수 없습니다. 국제관계는 자국의 국익에 따라 철저히 움직이는 것이 생리입니다.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에서 문수보살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BR>사드는 가짜안보이고 평화가 진짜 안보입니다. 무기는 무기를 부르고, 평화는 평화를 부릅니다. 한국전쟁 이후 내전 상태인 대한민국은 이제 휴전협정을 걷어내고 평화협정으로 통일의 물꼬를 터야 합니다. 주요정치일정마다 이용하는 ‘안보’ 논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진정한 낙원 세상이 꽃핍니다. <BR>오늘도 성주, 김천은 촛불을 켤 것이고, 원불교의 국방부 앞, 미대사관 앞 기도는 간절히 이어집니다. “평화를 원하거든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말씀 새기며 오늘도 평화 발자국 이어갑니다. “사드가고 평화오라”&nbsp;</FONT></DIV>
<DIV></DIV>
<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
<DIV></DIV>
<P align=justify>글_ 이태옥 원불교성주성지수호비상대책위원회 기획위원<BR>원불교환경연대에서 생명·평화·탈핵순례와 100개 햇빛교당을 만드는 등 에너지개벽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난해 9월부터 원불교 성주성지가 ‘사드’문제에 휩싸이면서 원불교 평화운동의 지평을 넓히는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다.
<DIV></DIV>]]></description>
<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Mon, 06 Mar 2017 16:49:58 +0900</dc:date>
</item>
<item>
<title>[삶과 인드라망] 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AI 대재앙 시대에...</title>
<link>http://indramang.cafe24.com/bbs/board.php?bo_table=indramang_column&amp;wr_id=248</link>
<description><![CDATA[
<P align=justify><FONT size=3 face=돋움><STRONG>인간의 탐욕으로 빚어진 AI 대재앙 시대에...</STRONG></FONT>&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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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요즘은 하루하루가 정말 살얼음판 걷는 심정이다. 우리 농장만 방역과 소독을 철저히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처럼 달걀 하나가 이토록 소중하고, 닭 한 마리가 이토록 고마운 적은 없었다.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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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17년 전, 11년간의 월급쟁이 생활을 마감하고 이곳 산청 지리산 자락에 작은 통나무집을 손수 지어 둥지를 틀고는 유정란 농장을 시작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1,000수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의 농장을 꾸려가고 있는데, 최소 몇만 수를 키우는 케이지식 농장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구멍가게 수준인 셈이다. 많은 사람이 내게 묻는다. 1,000수도 채 되지 않는 닭을 키워 어떻게 생활하고 애들 공부 다 시켰냐고? 우리 부부가 남의 손 빌지 않고 하루 반나절만 일하고도 빚지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은 소농 직거래 판매와 닭의 입장에서 닭을 키운다는 점이다. <BR>&nbsp;&nbsp; <BR>사상 최악의 AI 사태로 3,000만 수가 넘는 가금류들을 땅에 묻었고 온 나라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이 시점에서, AI 바이러스가 제주도에서도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축산농가뿐 아니라 공무원에 군인까지 투입되어 AI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고 전파 경로 또한 오리무중이니 실체 없는 적과 싸우는 격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제 방역은 무의미한 게 분명하다. 일 년 내내 상존하는 AI 바이러스를 스스로 이겨 낼 수 있는 면역력을 가질 수 있도록 건강하게 그리고 닭의 입장에서 닭을 키우는 것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다는 뜻이다. 이제는 정부 당국에서도 축산업의 새로운 구조조정을 시작해야 할 때가 분명하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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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AI가 전국에서 발병하고 있는 이 시기에 정부 당국은 조류독감의 주범이라며 죄 없는 철새들에게 더 이상 누명 씌우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많은 농장에서 AI가 발생했지만, 발병경로를 명확히 밝힌 곳은 한 곳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방역과 소독만으로 어떻게 AI를 막아낼 수 있겠는가. 정말 철새가 AI 전파의 원인이라면 정말 답이 없다. 해마다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그 많은 철새를 어떻게 관리할 수 있겠는가.&nbsp;&nbsp;&nbsp;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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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이제 감기 바이러스처럼 일 년 내내 상존하고 있는 AI 바이러스를 소독이나 방역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다. 닭이나 오리 스스로 면역력을 가질 수 있도록 건강하게 키우는 것 말고는 AI의 확산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내 개인적 생각이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물, 공기, 햇빛이 가금류의 건강을 좌우한다고 본다. 그래서 닭들이 햇볕도 쬐고 모래 목욕도 할 수 있는 축사 환경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좁은 공간에서 더 많은 수익을 내려는 공장식 밀식사육이 아닌 동물복지를 고려해서 키우는 것만이 AI라는 대재앙을 막아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이 분명하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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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하지만 얼마 전 동물복지 인증을 받은 농장 닭들도 AI에 감염되어 살처분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충분히 그럴 개연성이 있었다. 그 이유는 먼저 동물복지농장 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알을 낳는 닭의 경우, 최소 4,000수 이상을 키워야 신청이 가능하다. 소규모라야 더 동물복지답게 닭을 키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1,000수 정도를 키우는 우리 농장은 동물복지농장 인증을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현재 동물복지농장의 경우 평생 햇빛 한 번 볼 수 없는 무창계사에 전깃불을 켜서 인공조명을 해도 품질인증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는 닭을 건강하게 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물, 공기, 햇빛임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동물복지가 닭을 알 낳는 기계로 보지 않고 닭의 입장에서 닭을 대하는 것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정부 당국이 동물복지에 얼마나 문외한인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제발 정부 당국은 진정한 동물복지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해주기를 바란다.&nbsp; </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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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우리나라 산란계의 경우, 소위 공장식 축사인 케이지식(새장) 방식이 전체 농가의 98.5%를 차지하고 평사 방식으로 사육하는 농가는 고작 1.5%에 불과하다. 독일의 경우는 케이지식 방식이 10%이고 평사 방식이 90% 가량인데 이는 우리나라의 닭장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 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케이지식 닭장은 A4 용지 한 장 정도 면적의 철망 안에 암탉 두 마리가 평생 인공조명에 햇빛 한 번 보지 못 한 채 사료 먹고 알만 낳는 방식으로 사육되는 것으로 보면 된다. 물론 지금 이 시각에도 AI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대부분의 농민을 폄훼하려고 이러한 문제점을 제기하는 건 결코 아님을 밝힌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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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래서 사육 환경 개선이 AI를 막아낼 대책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축산물의 유통 구조가 먼저 개선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현재 대부분 축산농가는 대기업 하청 방식이라 유통 단계에서 큰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실제로 축산농가에 돌아가는 수익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 농가들이 케이지식 사육 방식에서 탈피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정부 당국이 유통 단계를 단순화시켜 물류 거품이 빠지게 함으로써 축산농가에 순수익이 더 많이 돌아가게 되면 사육 환경이 점차 개선될 것이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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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그리고 정부 당국에서도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할 때라고 본다. 산란계의 경우, 이제부터라도 유럽의 여러 국가들처럼 케이지 방식의 축사 신축을 금하고 평사 방식의 축사만을 허가해주는 일종의 혁신이 있어야 하고 달걀 농장을 가정용 달걀 생산 농장과 제과 제빵 등을 만드는 가공용 달걀 생산 농장으로 이원화해서 관리하는 정책을 펼칠 때, 일 년 내내 상존하고 있는 AI 바이러스로부터 닭들을 지켜낼 수 있다고 생각된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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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결국은 진정한 동물복지 실현과 축산물 유통구조 개선이 AI 사태의 근본적 해결책이 아닐까. 현재 전국 곳곳에서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직거래 판매를 통해 제 값 받으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닭들을 키워가고 있는 소규모 유정란 농장들이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제 값 받고 농산물을 팔아야 농민이 행복하고 그래야 닭들이 건강해지고 그 닭들이 낳는 달걀 또한 건강한 먹거리가 된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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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마지막으로 여전히 AI와 힘겨운 싸움을 하는 축산 농가 농민들에게 국민이 더 많은 관심과 응원을 보내주고, 그동안 영문도 모른 채 땅속에 파묻힌 3,000만 수가 넘는 생명에게도 명복을 빌어주고 애도의 마음을 가져 주기를 간절히 부탁드린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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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FONT>&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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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justify><FONT face=돋움>글_최세현 지리산생명연대 공동대표, 산청 간디유정란농장 농장지기<BR>17년 전 산청으로 귀농해서 닭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숲해설가로 지리산 둘레길 코디네이터로 지리산을 온전히 지켜내는 일에 힘을 보태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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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creator>인드라망</dc:creator>
<dc:date>Sat, 04 Feb 2017 14:21:0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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