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 이어)

 

4. 고추 꼭지를 따다

 

이튿날 아침, 영주씨와 나는 늦잠을 자다 바깥에서 두런두런 주고받는 말소리에 잠이 깼다. 이 선생님 댁에 올라가 아침을 먹은 뒤에 우리 두 사람은 어제 봤던 할머니들과 함께 고추 손질 작업을 같이 하기로 했고 형님 둘은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장류 가공 시설에 올라가 된장을 용기에 담는 일을 하기로 했다.

건고추의 꼭지 따는 일은 집에서도 해봤지만, 이 곳에서는 고추장에 쓸 것이라 엄청난 분량-이십 근 짜리 비닐푸대가 거실 둘레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니-을 다듬어야 했다. 그 날 오전에도 홍성에서 온 오톤 트럭이 천사백 근 정도의 고추 푸대를 부리고 갔다.

그 주변 동네는 거의 관행농을 하고 있어 유기농 태양초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자동차를 이용해 재료가 운송되는 문제는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고추를 자리 위에 풀어놓고 할머니들과 둥글게 둘러 앉으니 매운 냄새 때문에 시작 전부터 여기저기서 기침이 나왔다.

할머니들의 손은 재빨랐다. 또 그네들의 손만큼이나 입 속의 혀도 바지런해서 거의 쉴 새 없이 수다를 이어가셨다. 매운 내 때문에 기침과 재채기를 계속하면서도 이야기의 맥을 끊지 않으려는 그 가열찬 의지라니. 그 분들의 수다에는 다양성, 연속성, 씻김의 특성이 있다. 우선 이야기의 소재가 농사일, 자녀 자랑, 동네 사람들 장단점, 결혼한 이주 여성 문제, 자살한 연예인에 이르기까지 삶의 총체적 문제를 망라할 정도로 다양했고, 한 분의 말씀이 끝났다 싶으면 잠시라도 침묵의 여유를 불허하고 마치 끝말잇기를 하듯 또 다른 분이 받아 이야기를 살리는 연속성이 있었으며 간간히 터지는 폭소는 몸을 흔들고 얼굴 근육을 움직여 단조로운 노동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가장 연장자인 팔십 세 할머니는 손놀림에서 젊은 할머니들에게 꿀리지 않았고, 주름살 많은 할머니는 내 맞은 편에서 이따금 의심스런 눈초리로 내게 이것 저것 물어봤고 그 옆에 앉은 완석 어머니란 할머니는 별 내용이 없는 얘기에도 잘 웃었는데 한번 제대로 웃음이 터지면 잘 제어가 되지 않아 괴로울 지경까지 갔고 내 옆에 앉은 효선 어머니는 일행 중 가장 젊었는데 손이 가장 빨랐고 나와 영주 씨가 민망해 할까봐 주름살 많은 할머니의 질문에 대신 대답해주는 배려를 보이기도 했다.

그 고추 속에는 햇살 좋은 날 우리들의 기침과 눈물과 콧물과 침과 웃음과 한숨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가 더 맛깔난 고추장을 만들지 않을까 멋대로 상상해 봤다.

 

오전 일을 마치고 물개 형님이 밤늦게 운전해 온 캠핑카를 구경했다. 오톤 트럭의 뒷편에 커다란 박스카 시설을 설치했고 한 쪽 옆에 문이 달려 있다. 작은 계단을 올라 그 속에 들어가 보니 약 4-5평의 공간에 넓은 침상이 두 개, 테이블과 식탁, 창문, 화장실과 주방공간이 있었다. 어렸을 때 TV '주말의 명화'시간에서나 몇 번 봤던 그 캠핑카, 그 자유와 유목과 낭만의 상징을 직접 보게 되다니... 아직 내부 공사 중이라 조금 허전한 감이 있었고 영화에서처럼 넓어보이진 않았지만 그 차를 타고 마음 끌리는 데로 돌아다니고,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인생과 풍류를 논하고, 황홀한 연애를 하고, 깊은 고독을 음미하는 상상에 빠져 행복감에 젖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곧바로 물개 형님의 '착한 어린양'이 되어 "꼭 태워주셔야 해요?"하면서 알랑거리기 시작했다.^^

이남곡 선생님도 뒤늦게 들어와 둘러보시더니만 적잖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흠, 잠도 여기서 잘 수 있단 말이지?"하며 신기해 하셨다. 예전부터 캠핑카나 사막의 천막집, 강가의 뗏목집 처럼 유목과 정착이 뒤섞일 수 있는 공간을 동경했다. 하지만 물질과 에너지 소모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를 더 모색해야 한다. 물개 형님은 영주 씨와 내게 "추운데서 고생하지 말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오라"고 자꾸 유혹했다. 바닷가 넓은 집에 혼자 산다는 것이다. 이 분은 아무래도 오십대의 몸에 십대 후반의 정신 세계가 깃들어있는 바다 사나이같다.

 

점심 밥상에는 '좋은 마을'표 청국장 찌개와 보리고추장이 올랐다. 청국장은 구수한 맛이 깊어 자꾸만 숟가락이 갔고 보리고추장은 매콤하면서도 달지 않아 뒷맛이 깔끔했다. 서 선생님은 할머니들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자기 집 일이 바쁜 시기인데도 품일을 해주어 고맙다고 하셨다. 이 선생님은 전날 오랜만에 과음을 하셨다면서도 손님들에게 또 술을 권했다. 물개 형님과 할머니들이 한 자리에 모였으니 밥상이 어찌 조용할 것인가? 맛과 웃음이 풍성한 시골의 밥상.

 

5. 이웃들

 

점심을 먹은 뒤에 박정주 선생 집에 놀러 갔다. 새로 지어진 그 집은 너와 지붕에 두 개의 항아리를 엎어놓아 멋을 냈고 황토색의 흙벽으로 곡선의 부드러움을 살려 겉보기에도 예쁘고 깜찍했다. 그런 집을 '목천흙집'형태라고 했다. 안에 들어갔더니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천정과 둥그스런 벽이 아늑함을 더한다. 박 선생님 부부는 작년 10월에 귀농해서 현재 작업장으로 쓰는 빈집에서 살면서 그 집을 지었고 지금도 정주 선생님 혼자서 쉬엄쉬엄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부인되시는 분-죄송하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이 직접 만든 뽕잎차를 내 주셨다. 올해 들어서 세 번째 마시는 뽕잎차. 입안에 감도는 싱그럽고 구수한 맛. 돌이켜보면 그 차를 대접받은 자리가 모두 평온하고 흐뭇했다.

 

정주 선생님은 백발에 눈이 아주 맑은 노신사 분인데, 오래 전부터 '양계혈통'을 연구하고 계신다. 나는 처음에 무슨 닭의 종자를 연구하시나보다 생각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양성평등주의에 입각해 부계혈통주의와 가부장제에 반대하고 양쪽 혈통을 대등하게 존중하자는 주장이다. 아버지가 씨를 제공하고 어머니가 밭이라는 전통적 사고를 거부하고 호주제나 동성동본혼에 대한 터부에 반대하면서 평등한 가족관과 제도에 대해 연구 중이시다. 선생님은 대외적으로 성을 사용하지 않는데, 이 연구를 하면서 유림사회로부터 숱한 공격과 비방을 들었고 전공도 아닌 가족 관계법을 공부하게 됐다고 했다. 부인은 서울에서 의상디자인 학원을 운영하다가 귀농했는데 두 분은 시골에서 4H운동(농촌청소년운동)을 하면서 만나서 아홉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두 분의 '평등'한 부부관은 공간을 통해서도 반영되고 있다. 거실을 중심으로 정면에는 주방 시설이 보이고 왼쪽에는 정주 선생의 연구, 집필실로 쓰는 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인이 사용하는 신식 재봉틀 몇 개와 온갖 색상의 원단들이 걸려있다. 정주 선생님이 입고 있는 옷이 모두 부인의 솜씨란다. 고추 다듬는 할머니들에게도 조끼 한 벌 씩을 만들어 선물하셨다.(나는 이 광경을 보고 부인에게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또 거실의 한 쪽 책장에는 남성학, 여성학, 가족 문제에 관한 책들이, 다른 한 쪽에는 패션디자인 교본과 사진책들이 꽂혀 있어 서로 다른 영역과 관심이 사이 좋게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분들이 생전 처음 도전한 표고 버섯 재배하는 비가림 하우스도 구경했는데 집 짓는데 신경쓰느라 거의 돌보지 못했다는 말처럼 세워진 나무 말뚝들에는 버섯이 별로 달려있지 않았다. 한 때 표고를 재배했다는 물개 형님이 어찌 가만히 계시겠는가! 예의 '직설적인' 훈수로 표고재배의 기본에 대해 바로 '교육' 들어가시고, 정주 선생님은 착한 학생이 되어 경청하신다.

나는 이미 자연산 송이를 캐 본 몸이라(으쓱), 재배하는 버섯에 별로 관심이 없어 홀로 일행에서 빠져나와 성균 씨 집에 놀러갔다.

 

나는 카톨록신자는 아니지만 예전에 카톨록노동사목 사람들과 어울려 논 적이 있어서아는 선배와 친구들이 조금 있다. 신자도 아닌 주제에, 새만금의 해창갯벌서 열린 독특한 미사에서 문규현 신부님에게 전병을 얻어 먹기도 했고, 평택 대추리 공소에서는 만오천 전투경찰과의 접전을 앞두고 문정현 신부님의 비장한 강설에 영예로운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성균 씨가 내가 아는 선배를 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난날들이 회상되고 더욱 친근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집에 들어가보니 그도 전날의 과음으로 늦잠을 잤는지 부시시한 모습으로 날 맞이했다. 생후 2개월된 아기가 낯선 아저씨의 인사에 칭얼대자 아빠는 아이를 안아 조금 코맹맹이 소리가 나는 음성으로 나즈막히 노래를 불러주었다. 애잔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내는 몸살이 나서 쉬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부부와 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었으나 아픈 사람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금방 돌아왔다. 그 가족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하면서.

오후에는 이 선생님 밭에서 같이 고구마를 캐고 저녁을 함께 먹었다.

 

6. '남곡'(남쪽 골짜기)에 모이다.

 

저녁 식사 시간은 두 세 시간 이어지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각자의 사는 얘기부터 남성과 여성의 특성, 역할, 바람직한 부부상과 가족상에 대해 자유 토론이 있었다. 개인적인 얘기를 잘 안 했던 수재 형님의 지난 고민을 듣고 조금 놀라면서 믿음이 갔고 이남곡 선생님과 서혜란 선생님이 입장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이 선생님은 "여성운동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모순에 맞서며 부정적인 남성성을 답습하는 경우가 있다. 역사의 과정상 그러한 시기가 분명히 필요하지만 그렇게 해선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전술면에서도 여성성을 더 깊게 해서 그것으로 감화시켜야 바뀔 수 있다. 유니섹스라는 것도 아닌 것 같고...여성운동하는 사람들에게 욕먹을 소리지만, 나는 남성들에게 오히려 남자다워져라고 주문한다. 남자들에겐 멀리 보는 힘이 있고 굳건하게 중심을 잡아 주는 힘이 있다. 대신 여성은 남성보다 한결 섬세하고 미시적 차원의 일을 잘 챙기는 면이 있다. 이건 우열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의 특질, 차이가 있다는 얘기인데 이런 부분을 서로 잘 살리고 서로 긍정해주는 게 성평등 아닐까?"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다.(기록을 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기억하는 부분과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씀이지만 곰곰히 생각할수록  마음 속에 드는 의문이 있다. 일반적으로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되지만, 세상이 복잡해질수록 사람들의 품성, 환경, 교육 정도에 따라 그 특질이란 것이 거꾸로 나타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하고, 수시로 변한다고 본다. 식민지 때의 여성독립투사나 노조운동가, 한부모가정의 여성가장, 여성 운동선수들 경우 보통의 남성보다 더 폭넓은 역사적 안목이나 굳센 의지를 보이기도 하고 반면에 여자 형제가 많은 집의 남성이나 남성 예술가, 생태주의자, 평화주의자들의 경우 일반 여성보다 더 섬세하고 예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수한 사례를 일반화시키자는 게 아니라 사람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자신의 의지나 직업 환경의 영향으로 다른 성의 특질이라고 알고 있는(또는 학습해온)특성을 자기 내부에서 발견하고 키울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페미니즘을 공부하진 않았지만, 오랜 세월동안 학문, 종교, 정치 영역 등-이른바 지배이데올로기를 생산해는 영역-에서 여성이 배제되었고, 인류 역사를 기록해 온 사람 또한 대부분 남성이었음을 고려할 때 성의 특질이나 구별에 대해서도 공평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불과 100년-20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과 노예는 사람 취급도 못 받았고 남성 지배이데올로기가 몇 천년을 통해 사람들을 교육해왔음을 환기해야 한다. 남성성, 여성성, 남성적 가치, 여성적 가치란 말은 개념의 구별일 뿐 나는 육체적인 성징 이외에 실제로 남성과 여성에게 정신적으로, 능력적으로 고정적인 특성이란 없다고 보는 견해다. 그런 구별이 자칫 인간성에 굴레와 한계를 지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좀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남성성과 여성성을 넘어서 근원적인 인간성, 자연성, 우주성을 추구한다. 물론 '지금의 내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라 생각하면서...

 

이 선생님은 당신이 홀어머니를 모시다가 근처에 요양원으로 옮겨 모신 얘기를 하면서 내게 지나친 의무감으로 가족을 대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가족은 서로의 자립을 인정하면서 서로 돌본다는 생각으로 대해야 행복할 수 있다며. 귀한 말씀이다. 삼대째 이어져온 장손 콤플렉스는 내 의식의 독이다. 그것은 사랑의 본질을 퇴색시키고, 종종 활력을 떨어뜨리고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선생님은 직접 쓴 책 '논어를 연찬하다'(희망연대,2007)를 우리에게 선물하셨다. 2년간 멍덕골 주변 사람들과 '논어'를 읽고 삶의 이야기를 나눈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연찬'은 야나기시즘 공동체에서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논의해서 생각을 단련하는 과정을 뜻한다. 선생님은 고전을 통해 지혜를 배우기도 하지만 그것을 귀농자들과 같이 읽고 얘기하면서 소통의 고리로 삼아 서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는다며 '성경'도 같이 공부했다고 하셨다. 책은 '논어'를 관계의 철학으로 풀이해놓았고, 당시 논의에 참가한 사람들의 대화 내용까지 그대로 삽입되어 현장감과 읽는 재미를 더 해준다. 청소년과 어른이 같이 읽기에 좋은 책이다.

 

우리들이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선생님은 "오늘 얘기를 나누다보니 갑자기 옛날에 읽은 '수호지'가 생각난다. 거기에 다양한 백팔 명의 호걸들이 양산박에 모여서 썩은 세상에 맞서서 싸운다. 우리들도 여러 삶의 골짜기를 굽이굽이 거쳐서 오늘 이 곳에 모인 것 같다. 우리가 다같이 힘을 합쳐 세상에 희망을 주는 골짜기를 한번 만들어보면 어떨까"라고 하셨다. 그 말씀에 가슴이 벅차오르며 술이 확 댕겼다!

과연 남쪽 골짜기에 사는 '남곡'선생님 댁에 모여 뜻있는 사람들과 의기투합을 했으니 나의 삶은 또 한번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7. 작별

 

저녁을 먹은 뒤 형님 둘은 캠핑카로 먼저 떠나고 영주 씨는 나와 하루 더 동침한 뒤에 다음날 아침 작별했다. 나는 하루 더 묵으면서 고추손질 작업을 하고 정주 선생님 댁에서 놀다가 그 다음날 떠났다.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이 선생님이 면소재지까지 배웅해주시며 "겨울에 영주하고 같이 고추장 담그는 것 배우러 와!" 하셨다. 곧 버스에 올라타자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서 코끝이 찡해졌다. 아버지와 서로 웃으며 작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효막심한 자식이지만 아버지는 저승에서도 내 걱정을 하실 것만 같아 죄송하다. 아버지의 삶이 헛되지 않도록 더 맑아지고 밝아져야지.

물처럼 햇살처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