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상사 작은학교

                                           이경재(작은학교 선생대표)

1년 반여의 준비기간을 통해 2001년 ‘실상사 작은학교’(이하 작은학교)가 불교계 최초의 대안학교라는 별칭을 달고 문을 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작년부터인가 처음 작은학교 식구로 오시는 선생님들께 -아직도 많은 것들이 부족하지만 - 예전에 비해 지금은 정말 여건이 좋아졌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게 됩니다.

달랑 1자형 컨테이너 교실 두 동이 여섯 동으로(여전히 컨테이너 교실이지만), 창고 둘에 시원한 원두막까지, 늘어난 컴퓨터 대수, 산내지역에서 3채 임차로 시작한 생활관이 학교 소유 4채에 임차 4채를 더하여 총 8채의 생활관을 운영하고 있고(작은학교 때문에 산내지역 집값을 올렸다는 원성이 자자), 지리산 생명문화교육원 주변에 확보된 3천 3백 평의 학교부지하며… 이외에도 많지만 이것이 그간 달라져 온 우리의 외형입니다. 처음 출발에 비해 엄청나지만, 밖의 일반적 학교 시설기준으로 본다면 그야말로 작은학교 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가 언제부터인가 ‘우리 학교는 작은학교가 아니라 큰 학교다’라고 또 하나의 별칭을 쓰게 되었습니다.(제가 쓴 ‘큰’의 개념이 상대적 시빗거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음을 인정합니다만, 이 대목에서 너무 깊은 오해는 없으셨으면 합니다.) 그럼 무엇이 우리 학교를 작은학교가 아닌 큰 학교라고 말하게 할까요. 여기에 대해 저의 대답은 ‘천년 고찰 실상사가 작은학교의 정원이고 천왕봉이 우리의 앞산이며 운동장이 두 개(아이들은 방과 후에 집에 가면서 시간나면 산내초나 산내중 운동장에서 축구를 합니다.) 아이들이 마을에 살면서 오고가는 만수천이 흐르는 산내면 전체가 작은학교이기 때문이다’로 에둘러댑니다.

이런 물리적 조건 속에 놓여있기에 제가 작은학교를 ‘큰’ 학교라 하였을까요?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만 재작년 스승의 날에 학부모회에서 5월 15일 스승의 날 점심공양에 떡과 과일을 내면서 “실상사에 계시는 스님과 농장식구, 한생명 식구, 교육원 식구 사부대중 모두가 우리 아이들의 큰 스승입니다”라는 글귀입니다. ‘크다’ ‘작다’는 상대적 비교를 떠나 이 글귀가 실상사 작은학교가 지향하고 담아가고자 하는 것들을 아주 명료하게 표현한 듯해서 그 감동이 오래도록 저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큰 토양을 딛고 있기에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한 열정 빼고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것 없이 시작한 작은학교가 많은 혼란과 힘겨움 속에서도 좌초하지 않고 작은학교의 역사를 한 장 한 장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더욱이 지금의 작은학교를 있게 한 어느 인연하나 소중하지 않은 분들이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는 작은학교의 시작부터 늘 변함없이 신뢰를 보여주시는 도법스님과 수경스님, 연관스님이 계셨고, 작은학교 설립추진위원회의 꾸준한 지원, 한결같으신 학부모님들의 참여와 도움, 이름을 밝히신 분이나 밝히지 않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 기도가 있기에 작은학교의 이 기상만큼은 흔들림 없다는 것을 ‘크다’에 실어본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걸어온 작은학교의 자취를 조금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학교를 준비하면서 어느 일보다 중시한 것이 교사공동체 만들기였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장’에 있어서 함께 하는 교사들이 학교의 철학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자기의 삶으로 가꾸어 가는가가 작은학교, 나아가서는 자기학교가 지향하는 가치의 실현을 꿈꾸는 대안학교의 앞날을 좌우하는 잣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 기초한 생명살림과 생태적․공동체적인 가치를 학교철학의 바탕에 두겠다는 출발점은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교과과정을 짜고 현안을 풀어가는 견해의 차이는  각자가 작은학교를 선택한 이유만큼이나 다양하여 처음에는 함께 무엇을 논의하고 결정해 내는 것 자체가 큰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대안학교이자 작은학교라는 방향성은 많은 기대를 낳고 그 기대는 서로를 신뢰하기에 앞서 좌절과 분노를 낳는 혼돈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서로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으며 여러분들이 그만두시기도 하였습니다.(이 혼란과 아픔의 일차적 원인은 대표인 저의 어리석음과 모자라는 인격이었음을 깊이 참회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남아서 함께 작은학교를 지탱하는 식구들은 함께 나눈 시간과 경험만큼 우리의 내면이 성숙하고 있음을 우리는 각자의 삶에서, 아이들․학부모님들과의 만남에서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이 여정은 2004년 1월의 개교 3년의 총 평가를 통해 분명하게 하나의 매듭을 짓게 됩니다. 작은학교가 아름답고 더욱 성숙한 가르치고 배우는 삶의 현장이 되기 위해서는 더 이상 형식적 절차주의 같은 잘못된 방식으로 학교현장을 왜곡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시도된 팀(기획운영/공부연구/생활문화) 중심의 학교운영체계는 학교를 보다 안정적인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집중과 실험의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공부영역입니다. 특히, 공부영역은 많은 도전과 실험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시도되고 있으며 어느 정도 틀이 잡혀가고 있습니다. 학교가 세운 중심철학 속에서 체험과 생활공부 영역은 비교적 정착되어 가고 있습니다. 반면 전체 교과운영 시간의 30% 범위에서 진행되는 지식공부영역은 많은 고민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초창기의 무모한 욕심에서 많은 것을 버리고 있지만 지식공부에서의 상대적 시간과 절대적 양과 질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분야는 작은학교에서의 지식공부를 작은학교답게 할 줄 아는 즐거운 흐름 속에서 지적호기심이 우리 아이들의 중심문화가 될 때 가능할 것입니다. 이 흐름을 자연스러운 우리의 공부문화로 만들기에는 교사는 교사대로, 학부모는 학부모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각자가 극복해야 할 것이 많은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학교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의 현장을 지향합니다. 생태적이고 건강하여 폭력보다는 평화로움이 무시보다는 배려가 공격보다는 따뜻함이 우리를 감싸는 작은학교를 꿈꾸고 있습니다. 어떤 분야는 많이 성숙한 반면 어떤 부분은 그 실천정도가 약합니다. 그 까닭은 아직도 우리가 진정한 자기 변화보다는 상대와 외부조건의 미성숙을 탓하고 공격하는 방식에 익숙한 탓일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지난여름 5박 6일간 ‘내안의 폭력, 우리안의 폭력 돌아보기’를 통해 다짐한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의 정신을 우리 각자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에서 놓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학부모와 학생의 관계입니다. 작은학교의 학부모님은 대부분의 대안학교 학부모님이 그러하셨겠지만 허허벌판의 컨테이너 두 동 학교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외형적 성장만이 아니라 교사공동체 내부의 성숙을 위한 끊임없는 참여와 가르침을 많은 인내심을 가지고 베풀어주셨습니다. 이 것이 지금의 작은학교를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특히, 학교시작의 초창기에 생겨난 어려움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과정에서 싹튼 1기 학생들과의 동지적 우정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건강한 관계에 기초한 교사와 학부모와 학생의 ‘도반관계’는 작은학교 역사의 균형추가 될 것입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과제를 살펴봅니다. 작은학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속의 실상사 작은학교’입니다. 작은학교 하나만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그물 속에서 건강한 하나의 그물코가 되어 끊임없이 그물과 그물끼리 걸림 없이 소통하고 나누어 가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학교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의 일원이고 한생명의 일원이고 실상사 사부대중 공동체의 일원이고 산내면, 지리산의 일원으로서 개인적 책무와 역사적 책무를 다 해나갈 것입니다.

지금  막 산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갈 무렵엔 작은학교 안에 초등과정이 운영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입질만 하다가 금년에 본격적으로 시도될 작은학교 포스트과정도 곧 그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단순한 고등학교 과정이 아니라 작은학교 철학의 결실을 맺어가는 방식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틀 속에서 풀어내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과정은 작은학교를 큰 학교로 키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작은학교는 우리의 삶이 가치와 실천, 형식과 내용으로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현장입니다. 실상사 작은학교는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부족한 것들을 하나하나 채워가고 끊임없이 생명평화를 실현해나가는 깨달음의 나무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