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연천 박용석 님
공장식 축산에서 친환경 농업으로_함께 살기를 꿈꾸다
이번 호 귀농탐방은 북쪽 군사분계선 가까이에 있는 경기도 연천군으로 갔다. 연천군은 북쪽으로는 동두천시에 붙어 있고, 서쪽으로는 철원군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18년 정도 축산농을 하다가 8년 전 친환경 농업으로 전환한 박용석 님을 만났다. 임진강 본류와 지류를 따라 찾아간 길은 아직 겨울 추위가 남아 있었다. 처음 찾은 연천군이 주는 낯섦과 임진강 너머 북쪽 땅의 낯섦도 어찌 보면 크게 다르지 않겠지 하는 구불구불한 생각을 하며 굽이굽이 길을 달렸다. 서울에서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연천군 군남면에 있는 영농조합법인 ‘임진여울’ 앞에서 박용석 님을 만났다.

▲ 박용석 님이 직접 지은 에너지 제로 하우스 ‘동심원’
박용석 님은 젊은 시절에 축산 사료 영업 일을 하였다. 하지만 직장이라는 조직 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아 고향 의정부와 가까운 연천군에 조그만 땅을 구입하여 양돈을 하려고 했다. 사료 영업을 하던 이들에게는 축산 농장을 갖는 게 꿈이기도 했고, 연천군 땅값이 가장 싸기도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축산 농장을 준비하려고 했는데, 막상 땅을 구입하고 보니 더 농장이 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30대 초반인 93년에 일을 그만두고 곧장 농장을 시작했다. 사료 영업을 하면서 알던 농장에서 씨돼지 20마리를 1년간 빌려주어 시작을 했다. 옛날에야 작은 규모로 시작하는 게 가능했지만, 지금은 대규모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스템이라고 한다. 축산 농장을 조금씩 늘려가며 안정된 양돈을 하던 박용석 님이 어떤 계기로 친환경 농업으로 삶을 바꾸었을까?
마지막 보내는 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양돈 농장을 하면서 늘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았다고 한다. 축산은 농업이라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한 사업이기도 하고, 살충제 계란 등으로 사회적 얘깃거리가 되면서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이 마음 한쪽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동물 복지를 적용한 농장을 만들기에는 경제적 부담이 너무나 커 불편한 마음을 늘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구제역이 퍼지면서 키우던 돼지들을 산 채로 묻는 일을 겪었고 양돈 농장을 접게 되었다고 한다.
2010년 연천군에 구제역이 발생하였다. 박용석 님 농장에는 구제역 피해가 없었지만, 연천군이 구제역 확진 지역이 되면서 멀쩡한 돼지까지 살처분해야 했다. 이웃 농장에서 살처분할 때 들려오던 돼지들 울음소리가 잊히지 않는다고 한다. 구덩이로 끌려가지 않으려는 돼지들을 방역 공무원들이 몽둥이로 때리면서 나는 울음소리였다. 살처분할 때 농장주들은 대개 나오지 않고, 가축들의 생리를 잘 모르는 방역 공무원들이 구덩이에 밀어 넣는다고 한다. 당연히 가축들은 낯선 곳으로 가지 않으려 버티고 공무원들은 몽둥이로 때리며 몰아가니 비명을 지를 수밖에…
병에 걸리지도 않은 돼지를 산 채로 묻을 수가 없어 박용석 님은 끝까지 버텼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도 키우던 돼지들이 몽둥이를 맞으면서 처분장으로 들어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농장에서 처분장으로 가는 유도로에 가림막을 쳐서 돼지들이 낯설지 않게 마지막 걸음을 옮기도록 하였다. 그걸로나마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그렇게 돼지들을 묻은 곳에 과일과 막걸리를 올리며 절을 드렸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보낸 1500마리를 위해 108배를 1500일 해야겠다 마음먹고 1년여를 했다.
정부가 바뀌고도 구제역은 발생했지만 피해 규모는 적었다는 말을 하며, 살처분은 한편으로 ‘인재’이기도 하다는 박용석 님 얘기가 꼭 틀린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공장식 축산 자체를 전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부가 바뀌는 것과 무관하게 축산 관리가 안정되게 굴러가는 시스템이 중요하다는 얘기로 들렸다. 그러려면 낙하산이 아닌 현장 경험이 있는 사람이 책임 있는 자리에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겠구나 싶다. 사실 이런 원칙은 대부분의 집단이나 모임에도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박용석 님 자택에 있는 목공 작업실. ‘두레공방’이라 이름 붙였다.
친환경으로 농사지어서 직거래해봅시다!
박용석 님은 양돈 농장을 하면서 둘레에 조그맣게 농사도 지었다. 농약을 뿌리면 머리도 아프고 몇 시간을 고생하던 경험이 있어서 친환경 농사를 하였다. 농사를 지으며 농민회를 비롯한 여러 활동을 하는 농부들의 형편이 좀 나아질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하다 미산면 농민회원들에게 친환경 농사를 지어서 직거래할 방법을 찾자고 제안을 하였다. 하지만 친환경 농사가 쉬운 줄 아느냐며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돈 농장을 접고 괴산이나 홍성으로 옮겨 친환경 농사를 하려 했는데, 그때야 주변 농민들이 반응하였다. 결국 연천에 눌러앉아 친환경 농사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직거래 방법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고 농민회 모임에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이때 경기도 학교급식 운동본부 일을 하던 최재관 님을 만나, 친환경 급식을 염두에 두고 일을 벌여 갔다. 6명이 시작을 했지만, 아무리 뛰어다녀도 팔 데가 없었다. 공공기관에서 농민단체를 쉽게 믿어 주지 않고 인지도도 낮았으니 길이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지역 농협에서도, 지자체에서도 도움을 받기 힘들었다고 한다. 스스로 길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쌀은 여전히 쉽지 않았고, 그나마 채소나 근채류에서 조금씩 길이 열렸다. 친환경 농산물을 팔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만난 사람들이 나중에 도움이 된 것이다. 마침내 2016년에 친환경 급식을 할 수 있도록 잡곡류(찹쌀, 현미 등) 160톤을 배정받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동안 긴가민가하던 농민들이 서서히 마음을 열어 함께하게 되었다고 한다. 6명이 시작한 친환경 농업이 지금은 77명이 되었다. 수확할 때는 온 동네에 현수막까지 내걸고 자랑을 하였다. 그제야 농협이나 군수가 이들을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친환경 농사를 짓는 모임은 ‘임진여울’이라는 영농조합 법인이 되었다. 귀농을 꿈꾸는 청년을 모셔와(?) 함께 일하고 있다. 청년 김부진 님은 이곳 법인 일을 하는 틈틈이 서울을 오가며 관련 공부도 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조그맣게 농사도 지어 볼 계획이라고 한다.
박용석 님이 걸어온 길은 어찌 보면 지역 농민들이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일이구나 싶었다. 혼자 조용히 자기 길을 가는 분들 못지않게 모두가 함께 살아갈 길을 찾고 만들어 가는 일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앞으로는 ‘임진여울’ 농부들이 안정되게 농사지으면서 학교급식뿐만 아니라 지속가능한 마을을 이루는 데에도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박용석, 김부진 님
관 주도를 벗어나 농민이 스스로 길을
연천군은 전쟁이라는 아픈 기억이 남아 있고, 비무장지대가 가까이 있어 상대적으로 보수적이다. 변화에도 부정적인 분위기가 많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친환경 농사와 학교 급식이라는 일을 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농민들 힘으로 이루어 냈다는 것은 상징성이 크다고 하겠다.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겠다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셈이다.
앞으로는 밀 농사도 해볼 계획이라고 한다. 요즘은 많은 사람이 주식으로 쌀만 먹지 않고 빵도 먹는다. 그래서 건강한 먹을거리를 중심에 놓고 밀 농사를 지어 다양한 빵도 만들고 체험을 하는 시스템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지역에 청년 귀농인이 생겨나고, 마을 공동체가 살아났으면 한다는 바람을 얘기해 주었다.
글_ 나익수 인드라망소식지 편집위원
책을 만듭니다. 녹색 삶을 지향하며 그렇게 살 수 있는 삶을 모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