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여행으로 만난 농촌
시골에 내려오기 전, 권명심 님은 도시에서 은행원으로 일했다. 그때의 생각을 들어보면 여느 도시 사람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에 그냥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사람이었고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거든요. 하는 일에 대해서 환경을 파괴하거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오로지 저의 관심사는 올해 연봉을 더 많이 받고 승진을 하느냐는 거였어요. 일은 당연히 스트레스 받고 힘든 일이었죠. 일 자체에 가치가 있거나 일로 보람을 느끼고 자아성취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자아성취나 보람은 취미 생활에서 찾는 거로 생각했어요. 그래서 취미 생활 많이 했어요.”

그 취미 생활 중 하나가 여행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한다. 그때 공정여행을 하는 단체를 통해서 지리산 둘레길을 걷게 되었다. 그 여행으로 머릿속으로만 알던 농촌과 처음 만났다. 그 전에는 여행을 많이 다녀도 관광지 위주로 다녀서 농촌은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마을회관에 가서 시골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이 여행을 계기로 ‘귀농’이라는 말을 알게 되고, 귀농 관련 책도 찾아 읽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각에도 점차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제가 하는 일이 괴물같이 느껴지는 거예요. 커다란 금융프로젝트를 하는 것 자체가 거의 토건 세력들을 위해 하는 거거든요. 일에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서 모순을 많이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일에 대해서도 가치를 생각하다 보니까 내가 하는 일이 단순히 은행 업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은행에서 지원하는 금융사업이 이 사회를 파탄으로 만들고 서민은 힘들고 대기업은 잘 살게 만드는 방식으로 가더라고요. 은행에서 하는 일이 너무 가치 없고 파괴적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루하루 일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생태적인 삶, 환경을 파괴하지 않는 방법을 다룬 책을 계속 읽으니까 생각과 삶 사이에 괴리감이 너무 커지는 거예요.”

그렇게 다른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인드라망 불교귀농학교와 인연이 되었다. 이후 두물머리에서 4대강 투쟁할 때 록빠(티베트 난민을 돕는 비영리민간단체) 작목반 일원으로 함께 농사지으며 투쟁하기도 했다. 농사를 지어 보니 성향과 잘 맞고 재미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크게 농사짓고 싶다는 생각에 귀농을 마음먹게 되었다.

귀농을 꿈꾸었지만…
귀농지를 찾던 중 우연히 남원시 산내면의 여성농업인센터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면접을 보러 내려왔다가 활동가 숙소도 소개를 받았다고 한다. 일자리와 집이 한꺼번에 해결되니 그 길로 산내로 내려왔다. 귀농을 목적으로 했지만, 바로 농지나 집을 구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이렇게라도 농촌에 있다 보면 길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산물을 팔기 위해 짓는 농사는 만만치 않은 일임을 처음으로 느꼈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 실상사농장에 가서 공동체 울력(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노동)을 했는데 이때 상품성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배추가 다 반품되는 일을 경험하기도 했다. 게다가 농사는 천재지변과 같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비싼 농지 가격도 농사를 어렵게 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농사를 시도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시골에 내려온 1~2년은 활동가 텃논과 텃밭에서 작게나마 공동체 활동가들과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또 빵아재(한생명 느티나무 매장 내 유기농 빵가게)에서 일할 때 모든 재료를 다 자급해보고 싶은 마음에 밀농사, 딸기농사도 했다. 하지만 땅이 척박해 밀 수확량이 너무 적었고 힘이 많이 들어 다음 해부터는 다른 농부님들께 맡겼다고 한다.

‘우리가 불편했던 거 다 알려 줄 거다’ 농촌 페미니즘
지금 권명심 님은 ‘문화기획 달’이라는 곳에서 일하고 있다. 문화기획 달의 주요 사업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여성주의 문화예술교육 기획’이고 다른 하나는 ‘디자인살롱’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디자인 사업이다. 앞의 일은 의미와 가치에 비중을 둔 사업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일만으로는 활동비 마련에 어려움이 있었기에 디자인 사업을 병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 에코페미니즘으로 쓰는 다큐×마고 도서시리즈 (문화기획달, 2018)

같이 활동하고 있는 ‘달리’가 2014년에 1인 기획사로 문을 연 ‘문화기획 달’은 여자들과 글 쓰고 그림 그리면서 책을 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권명심 님은 2016년 말에 합류했다. 시골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많이 묻혀 있고 누구의 엄마, 부인, 이런 식으로만 불릴 뿐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통로가 없다는 생각에 여성들과 함께하고 싶었던 것 같다고 한다. 여자들끼리 모이니 자연스럽게 여자로서 겪는 일들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여성이 농촌에서 겪는 차별과 무시, 성희롱과 성추행 등. 마을회관이나 마을행사에 가면 늘 여자들만 일하고 남자들은 먹고 즐겼다. 마치 5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고 한다. 불만은 있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화기획 달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공론화시키고자 했지만, 시골에서 ‘페미니즘’이라는 말을 쓰기가 망설여졌다고 한다. 그래서 ‘농촌 성문화 다시보기’라는 (다소 순화되어 보이는) 사업명으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그리고 사업 끝에 커밍아웃하듯 ‘우리는 농촌페미니즘 한다’고 드러냈다.

부정적인 반응도 많았다. ‘왜 남자랑 여자랑 싸움시키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안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는 남성들이 먼저 술자리 성희롱, 성추행 발언이 거슬린다며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남성 페미니즘 공부 모임도 생겼다. ‘가부장적이고 여성 혐오가 있는 문화 속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억압받고 폭력을 당하고 힘들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장기적으로 마을 문화를 바꿔내고 싶은 것이냐’는 물음에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이런 것을 말해도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불편한 것이 어떤 거라는 걸 다 알려주고 싶었다’라고 한다. 권명심 님은 우리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했다고 소박하게 답했지만,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나는 마을문화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달’의 꿈, 농촌 여성의 꿈
문화기획 달에서 문화예술 교육을 하려고 하는 이유를 물었다. 여성에게 예술은 어떤 의미인가? 홀로 힐링하고 치유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자기 만족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하려는 일은 여자도 여기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 여자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거예요. 농촌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가 안 느껴졌거든요. 개인의 욕구와 의견이 있는 건데 누구의 마누라, 엄마 이런 이름으로만 불리고… 누구는 시, 누구는 음악, 누구는 그림, 자기가 마음을 표현하기 편하게 여기는 수단이 다 다르거든요. 예술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자 표현 양식인 거죠.”

예술은 감정적이고 감상적인 것,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지만,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게 못 한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자기표현을 할 수 있게 하는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예술이 이렇게 삶에 효과적이고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음을 새삼 느꼈다.

차분하지만 힘 있는 말투에 이끌려, 현재 진행 중인 흥미진진한 시도에 매료되어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우리 마을 안에 이처럼 멋진 시도와 실험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또 문제를 심각하고 무겁게 다루기보다 즐겁고 재기발랄하게, 가볍고 놀이하듯 넘어가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달과 권명심 님의 삶에서 더 많은 실험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농촌 여성들이 더 행복해지고, 그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도록.

■ 문화기획 달 누리집
: mooncult.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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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현미선 생명평화대학 활동가
생명평화대학 실무자로 있으며, 대학 식구들과 티격태격 지지고 볶으며 재미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