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게
아버지, 오늘은 54일의 순례를 마치는 날이에요. 인천-시흥-안산-화성-평택-아산-당진-서산-태안-홍성-보령-서천-군산-부안-고창-영광-함평-무안-목포-영암-해남-진도까지 안 좋은 길도 걸었고, 좋은 길도 걸었어요. 드디어 이 길의 마침표를 찍는 자리까지 왔어요.
세월호의 참사를 기억하며 희망의 길을 만들겠다고,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질문하며 걷겠다고, 무엇이든 하겠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호기롭게 길을 떠났어요. 그런데 정작 아버지에게는 출발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세월호 순례길을 만드는 길을 걷는다고 전화로 알렸죠. 그때 아버지는 세월호 이제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하셨어요. 마음속에 무언가 불끈 치솟았지만, 아버지가 그러시는 건 익히 예상한 바여서 넘길 수 있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세월호만을 위해 무언가를 요구하려고 걷는 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요. 걸으면서 방문했던 대추리와 매향리 얘기를 했죠. 개발과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삶터를 잃은 사람들을 만나니 마음이 아프다고, 앞으로 이런 사람이 또 있으면 안 되지 않겠냐고 말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말씀하셨죠. 경제성장이 되고 나라가 잘살기 위해서라면 그런 곳은 어쩔 수 없지 않겠냐고. 너희 젊은 세대들은 전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고. 그 말은 참기가 어려웠어요. 아버지가 나를 비롯해 약한 사람을 보호하는 수퍼맨이 되어주길 바랐어요.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힘든 사람을 염려하고 힘을 보태려는 사람이기보다 약자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라는 게 너무 실망스러웠어요.
태안을 걷는 동안에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합동 위령제에 참석했어요. 유족분들의 지난 삶을 들어 보니, 날 때부터 비상식적이고 야만스러운 역사를 살아내야 했던 아버지의 삶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엄혹한 시절을 살아내는 동안, 촌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향을 떠나 도시 이주민이 되어 가족을 지키는 일 또한 쉽지 않았겠지요. 아버지의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말이 그렇게 싫었어요. 아버지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은 제게 어리석게 굴지 말고 일찍 포기하고 순응하라는 이야기로 들렸어요. 현실의 세상은 제가 생각하듯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구요. 그런데 어쩔 수 없다는 그 말이 아버지가 가족을 지키며 어두운 시절을 살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말이었을 것이라고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 덕분에 지금은 세상이 정말 많이 좋아졌어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여전히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버지 젊었던 시절보다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세상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아버지의 딸은 아버지보다 더 큰 목소리로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딸을 지켜보며 염려되는 아버지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돼요. 아버지가 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신 것처럼 저도 미래의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 아이가 살 세상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아버지가 그렇게 제게 주고 싶어 하신 더 나은 미래를 저도 제 아이에게 주고 싶어요. 제가 제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은, 순례길에서 봤던 아름다운 들과 산과 바다, 동물들, 그리고 평화롭고 친절한 이웃입니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요.
54일을 걸으며 시골의 많은 마을회관, 경로당을 지났어요.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고 어르신들만 남아 스러져 가는 마을을 지키고 계셨죠.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우리 젊은이들이 추운데 고생한다며 간식거리를 아낌없이 내어주시고 쉼터도 흔쾌히 내어주셨어요. 그리고 다시 떠나는 우리의 등을 두드리며 남은 길을 응원해 주셨어요.
저는 꿈을 꿔봅니다. 제가 이 길 위에서 만난 아름다운 자연, 마을, 사람들 그리고 동시에 뿌리가 파헤쳐진 삶의 현장을 더 많은 청년과 함께 두 발로 만나는 꿈. 지금 제가 사는 산내처럼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이 어울려 시골 마을에 다시 활기가 도는 꿈을 꿔봅니다. 젊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마을에 남아 마을 일꾼이 되어 마을을 지키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렇게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시골 마을이 살아난다면 지금보다 더 생명이 귀하게 대접받는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요?
아버지,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이 수퍼맨 같은 아버지이길 바랐던 제 어린아이 같은 기대에서 비롯되었음을 압니다. 이제는 격동하는 대한민국에서 가족을 지키며 평범하게 남들처럼 살고 싶었던 한 사람으로서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다만 욕심내어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제가 희망과 미래를 이야기할 때 어쩔 수 없다는 말 대신, ‘그래, 네가 더 오래 살아가야 할 세상이니 앞으로 열심히 해봐라.’하며 격려해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만나 뵈었던 마을회관의 할아버지 할머니처럼 힘들고 지칠 때, 편안히 쉬어 갈 수 있는 쉼터가 되어주시면 좋겠어요.
지금의 이 삶을 가능하게 해주시고, 지금까지 든든하고 안전한 울타리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2017년 12월 9일 진도에서, 아버지의 딸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