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박(刻薄)한 시절을 이겨내는 힘

                                                                    중묵스님/인드라망운영위원장


적지 않은 세월 절집에 살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自愧感)과 심한 우울함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럴 때 주로 먼 길을 혼자서 걷는다.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딛기 어려울 때까지 걸으며 되풀이해서 떠올리는 기억이 있다. 충청도에 있는 자그마한 선방(禪房)에서 보냈던 행자시절의 기억이다.

새벽 2시 반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으로 시작되어 잠자기 전까지 쉴 틈없이 크고 작은 일들이 이어졌지만, 수행자의 삶을 가꿔간다는 희열속에서 큰 어려움없이 지냈다. 그런데 행자 생활의 큰 고비는 아주 사소한 곳에서 찾아왔다.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면서 많은 스님들이 겨울 한철 수행정진을 하기위해 모였고, 스님들을 시봉하기위한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내가 맡은 소임(所任)이 매 끼니 ‘국’이였다. 그 ‘국’이 탈이였다.

원래 혼자서 자신있게 할 수 있는 요리라는 것이 라면밖에는 없는 요리의 문외한(門外漢)이 20여명이 넘는 대중이 먹을 국물의 양과 맛을 제대로 맞추기는 어려웠다. 어느 날은 짜고, 어느 날은 싱겁고 국맛이 중심을 찾지 못하고 널 뛰듯 하였다. 이러다 보니 고참 행자의 핀잔 횟수도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해 놓은 짓이 있기에 편하게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 핀잔의 강도가 거칠어지면서 서서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딴에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출가를 했는데, 기껏 매일 아침마다 듣는 소리가 국이 짜니, 싱거우니 같은 잔소리고, 그런 잔소리에 걸려 우왕좌왕 어쩌지 못하고 진심(嗔心)을 일으키는 내 스스로가 비참했다.

작심(作心)을 하고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반나절 그렇게 참회의 절을 하고 나니 마음도 한결 편해지고, 고참 행자로 인해 생겼던 온갖 번뇌의 찌거기도 다 씻겨 나간듯 했다.

환한 미소 머금으며 가벼운 걸음으로 법당을 내려와 공양간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고참 행자의 싸늘한 눈초리와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날아온 고함소리 “야!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남들은 일이 밀려 고생하고 있는데.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지면서 치솟는 화를 어쩌지 못하고 공양간의 문을 발로 걷어차고 뛰쳐나와 버렸다. 수 없이 절을 하면서 다지고 다졌던 각오가 한 순간에, 마치 공든 탑이 우루루 무너지듯 꺾여 버렸다.

그 길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은사스님을 찾아 갔다. 삼배를 올리고 그 동안의 일을 얘기하고, 수행자의 삶을 가꿔갈 수 있는 근기(根機)가 되지 못하기에 절을 내려가겠다고 하였다.
스님은 묵묵히 내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차 한 잔을 내어 주셨다.

“김행자, 이 찻잔으로 바닷물을 떠내면 그 바닷물이 달라 보이겠는가? 그렇지는 않겠지. 그러나 바닷물은 이 한 잔의 물만큼 줄어든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수행자는 이러한 진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지. 너의 변화를 위해 네가 애를 쓴 만큼 사실은 너는 변해있다. 절 한번 했다면 절 한번 한 만큼 달라진 것이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행자로서 갈팡질팡하면서도 다시 추스르며 그런대로 살 수 있었던 힘은 초심자(初心者) 시절의 그 경험이였던 것 같다. 생(生)의 한 자락에 묻혀있는 각자의 좋은 경험들을 충분히 되새겨 각박한 시절을 이겨내는 힘으로 세웠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