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여러 면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분위기 같습니다. 세계적인 위기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진 한국경제, 아직 튼튼히 뿌리내리지 못한 민주화의 과제들, 불안정한 남북관계 등이 정권의 교체와 함께 서로 악순환하는 방향으로 증폭되는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과연 진보하는 것인가, 하는 오래된 물음 앞에 새삼스럽게 서지는 듯도 합니다.

 

  인생과 세상에 대해서 여러 가지 견해가 있고 진보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관점들이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을 증진시키는 것이고, 그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진보라고 한다면 세상은 분명히 진보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도 그렇지만, 더욱 사회나 세상은 앞으로 전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복(起伏)이 심하고 전진과 후퇴가 반복 점철되는 과정으로 진행이 됩니다. 가라앉고 후퇴하는 시기에 살다보면 세상이 어둡게 보이고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만, 그것으로 인생이나 세상을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 보면 우리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통해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2차 대전 이후 신생독립한 나라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뚜렷한 변화의 길을 걸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어둡고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반세기 전과 비교하면 그 시절로의 후퇴는 상상하기 어려운 지점까지는 나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어려운 시기를 맞아서 역설적으로 무엇이 진보인지, 어떻게 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알아차리게 하는 기회라고도 생각됩니다.

 

  경제(물질생활)가 어려워지면 정치, 사회,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창조적 활기가 사라지고 진보의 기운보다는 퇴영적인 기운이 감돌기 쉽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산업화로 표현되는 그 동안의 물질적 성과가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한 축이었음을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요즈음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면서 느끼는 과거로의 회귀(사실은 과거의 독재나 권위주의로의 복귀는 아니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는)를 보면서 새삼 우리가 이룩해 온 민주화라는 진보의 또 한 축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선진화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성과들을 굳히고 익혀서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떤 한 정파가 내거는 목표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세계적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지금까지 물질적 생산력(市場)과 자유․평등(自由民主主義)을 이끌어 온 개인주의가 이제 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시장도 자유민주주의도 중대한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실감하고 있습니다. 이 실감들이 진보의 현대적 중심축이 무엇인가를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겠지요.

 

  저는 이것을 인간화라고 부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화는 자기중심성을 당연한 것으로 하는 동물계로부터 질적으로 진화된 인간의 질서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자기중심적 가치체계, 이기주의를 넘어서 인간의 숭고품성(그것을 영성, 불성, 양심 또는 무어라 부르건)을 사회운영의 구체적 원리로 체현하는 것을 인간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진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인간의 탐욕이 시장을 해치고 파멸로 이끄는 것을 사람들이 고통을 통해서 느끼고 있는데, 방대한 규모의 정부개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시적 현상으로 본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재앙을 예비하는 것으로 될 것입니다. 생태환경의 위기에 더하여 이제 시장의 위기가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를 근본적인 문명전환의 기회로 파악해야 할 것입니다.

 

  물질적 생산력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의식혁명이 서로 보완 조화되는 새로운 진보의 지평이 열리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진보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비산비야(非山非野)라는 말과 인드라망이 그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예언서 같은 글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만, 새로운 세상이 비산비야(非山非野)에서 시작된다는 그 비슷한 내용이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비산비야(非山非野)란 현상의 세계(물질과 제도)와 마음의 세계(의식)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넘어서는 연대(連帶)의 방식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반드시 풀어야할 ‘존재와 관계의 방정식’인데 아마도 인드라망이 그 해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런 생각들이 새 봄을 맞으면서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