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
백 남 석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불교생협연합회(준) 준비위원장
살아오면서 힘들어했던 때를 생각해 보니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단호히 거절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이나 단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해야 할 일을 바로바로 해결하지 않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가며 ‘내일 해야지’, ‘다음에 해야지’ 하며 미루는 게으른 습관 때문이었다.
누구의 부탁이 되었든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인지라 잘 해낼 자신이 없는 일까지도 맡아 놓고는 힘들어했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능력과 상황을 고려해 거절하다가도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도와달라고 거듭 부탁하면 두말 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승낙해버리곤 했던 것이다.
육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들은 대체로 미루지 않고 하는 편인데, 글 쓰는 재주가 없다보니 원고를 써야하는 일은 늘 내일로 또 내일로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약속 전날이면 어김없이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면 ‘다시는 원고 청탁만은 받지 말아야지’ 하며 스스로 다짐해 보지만, 언제나 다짐으로 그칠 뿐이었다.
부탁이면 거절 못하는 성격 덕분이라 해야 할지, 탓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매우 다양한 불교활동을 해왔다. 미취학아동인 유아로부터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청년,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국무총리실이나 국정원 등 직장불자회, 군부대 법당이나 새터민(북한이탈주민) 법당과 소년원 법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오랜 기간 애정을 갖고 신명나게 활동했던 대상은 청소년, 즉 중고등학생들이었다. 초등학생 이하 어린이들은 보살피는 데 손이 많이 가야하고, 대학생 이상 어른들은 나름대로 길들여진 습관으로 인해 지도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에 반해 청소년들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진실하게 대하기만 하면 자기들 스스로 역할을 분담해 가며 맡은 일을 열심히 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활동을 통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어가는 모습을 보며 깊은 정이 들었나 보다.
지금도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은 여전하지만,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는 게으른 습관은 없어졌다. 게으른 습관을 고치게 된 계기는 중고등학생회 지도법사로 활동하면서 경험한 아주 사소한 일을 통해서였다.
하루는 정기법회를 마치고 뒷정리한 후, 교사와 학생 30여 명과 함께 낙원동 골목 분식집으로 갔다. 작고 조용했던 분식집은 이내 우리 차지가 되었고 신명나는 잔치판이 벌어졌다. 법회 보느라 하고 싶었던 말을 참았던 터라 각자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할 때부터 왁자지껄하더니 음식을 먹기 전까지 수다는 이어졌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데 불쑥 차림표 옆에 붙어 있는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이란 글이 눈에 띄었다. 그 글을 보는 순간 걱정 한 가지를 해결했다는 기분이 들어 기뻤다. 오늘은 현금으로 계산해야 하지만 내일 이후 돈이 없는 날에도 외상으로 음식을 사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오늘은 현찰 내일은 외상’이란 말은 내일 외상을 주겠다는 뜻이 아니라 ‘외상 사절’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알았기 때문이다. 주인의 재치 있는 표현에 불과하다 볼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마치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은 이후의 삶을 바꿀 만큼 컸다. 내일부터는 외상을 줄 거란 막연한 기대와 함께 ‘내일로’, ‘다음으로’ 미루던 게으른 습관까지도 없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내일’은 이론이나 관념으로만 이해되고 설명될 뿐, 실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오랫동안 실재하지도 않는 내일을 실재하는 줄 착각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잡힐 듯 잡힐 듯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일이다. 이젠 잡았다 싶은 순간 바로 오늘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오늘, 아니 이 찰나적인 순간만을 살고 있을 따름이다.
도연명(陶淵明)은 노래하고 있다.
“내일 그리고 또 내일. 어찌 그리도 내일이 많은가. 내 한평생 내일을 기다리다가 모든 일이 흘러가 버렸구나. 푸른 청운의 꿈들이 어느새 백발이 되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