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교수)

 

 

 

 

교사양성대학에 근무하다보니 나의 여름방학은 다른 대학 교수들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6월 성적 처리를 마치고 나면 특별한 신호나 의식이 없어도 여름방학으로 진입하는 것 같지만, 초․중등학교가 방학에 들어가는 7월말이 되면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는 점이 다르다. 여름 계절학기 강의와 여기저기서 교사들이 수강생들인 연수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7월 중순을 넘어서면서 올해도 어김없이 그런 유형의 여름방학이 진행 중인데, 오늘은 그 출발점으로 전북 익산에 있는 교육연수원 강의를 다녀왔다. 이번에는 초등학교 교사들이 수강생들이었는데, 대부분 이전에 근무했던 교육대학에서 만난 적이 있는 제자들이기도 해서 설레임과 반가움을 안고 기꺼운 마음으로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길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대형 강의여서 개별적인 만남의 기회를 제대로 갖지는 못했지만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3, 4년 정도의 경력을 쌓은 그 제자들이 보여주는 눈빛을 통해 우리 교육의 미래나 삶의 현재적 의미를 확인하는 데는 충분한 만남이었다.

 

그런데 다른 연수원 강의보다도 유독 익산에 위치한 그 교육연수원 강의를 기다리는 다른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연수원 가는 길에 수천 년 동안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석불 입상 한 쌍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길이 아니면 여간해서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폭력적인 일상의 굴레에 매여 있기 때문에 일 년에 두어 번 있는 연수를 손꼽아 기다리곤 한다.

 

오늘도 아침 일찍 서둘러 이십년 가까이 타고 있는 프라이드 자동차의 바퀴를 발로 두어 번 눌러본 후에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오후부터 강의가 있어 잘만 하면 덕진 연못의 연꽃 구경과 석불 입상 참배를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고속도로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오전 열한 시쯤에 연못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평일이라선지 단체로 놀러온 어린이집 아이들 말고는 한적했다. 진흙에 뿌리를 내리고도 저렇게 처연한 꽃을 피워내는 연꽃의 바다를 지켜보면서 잠시 피안에 든 듯한 아찔한 감각의 이탈을 경험하고 있는데 때맞춰 울려대는 휴대전화 벨소리 때문에 오래 만끽하지는 못했다. 이런 깜냥이라니...

 

 

   익산 고도리 석불입상

 

점심을 간단히 먹고 석불 입상과 연수원이 있는 익산을 향해 가고 있는데, 시간을 보니 정해진 연수 시간에 임박해 하는 수없이 먼저 연수원으로 가야만 했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 길을 거꾸로 잡아 석불 입상이 자리한 ‘고도리(古都里)’를 향해 달렸다. 백제의 옛 수도였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역사적 궤적은 상실한 그곳은 옛 수도라는 의미와 가장 작은 행정단위인 리(里)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만큼이나 많은 표정을 담아 사람들을 맞곤 한다. 권력이란 게 본래 그런 것인가 하는 허망함이나 한때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그곳을 메우고 있는 적막감과 쌩쌩거리며 지나쳐버리는 자동차 소리로만 남은 고도리의 정취는 그 자체로 무상(無常)과 공(空)의 진리를 웅변하는 것이리라.

 

돌부처님들은 내 걸음으로 이백 삼십 보 정도 떨어져서 각각 다르지만 여전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로 바라보고 계셨다. 가느다란 눈과 오묘하게 벌린 입술, 그 사이로 소리 없이 번지는 미소, 그리고 갈 때마다 내게도 나눠주시는 넉넉한 듯 하면서도 일상에 함몰된 내면을 향하는 깨침의 죽비 같은 소리 없는 소리들... 돌아오는 내내 그 소름 돋게 하는 소리들이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