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와 너구리

 농수로(農水路)를 따라 마을로 접어드는 한적한 논길, 아침 산책길에서였다. 맑은 물이 철철 뿜어져 나오는 도랑가에 너구리 한 마리와 까치 여덟 마리가 도랑을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구수회의를 하는듯한 놀라운 광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까치 한 마리가 깍깍깍 하고 지저귀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른 까치가 깍깍 하는 품이 꼭 까치가 한마디 하면 너구리가 무슨 말을 하고 그러면 까치 측에서 또 의견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마주한 듯 가만히 발을 멈추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갑자기 까치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며 깍깍깍깍! 다급하고 날카로운 경계음을 토해냈다. 순간 너구리는 뒤로 획 돌아서더니 뒤편의 푸른 논 벼 이랑 사이로 뛰어 들어가고 까치들은 일제히 반대 방향으로 날아올라 빠르게 소나무 숲으로 삽시간에 사라졌다. 즈이들을 보며 감탄하는 한 인간족속을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한 모양새다.

  비교적 식생(植生)이 잘 보존되어 있고 물이 풍부한 우리 고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盆地)인지라 숲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이 많이 있다. 호수가 있어 겨울이면 수백 마리 물오리 떼들이 날아들어 장관을 이룬다. 나는 마을의 들이나 숲길을 걸으며 이런 야생동물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반응은 오로지 하나, 엄청난 경계와 두려움으로 내 시야에서 벗어나려 사뭇 필사적인 모습을 보인다.

  호수에서는 물오리 떼들이 꽥꽥꽥! 한 마리의 신호음 따라 일제히 건너편으로 날아가고 숲길에서 만난 고라니는 심장이 멎을 듯이 놀라서 후다닥! 물 댄 논둑으로 내 달리고 족제비는 빠르게 덤불 사이로 숨는다. 호숫가의 초록뱀 논둑의 누런뱀 숲길의 예쁜 꽃뱀 할 것 없이 도망치려고 구불구불 안간힘이다. 때론 바로 옆에서 느닷없이 장끼가 비명을 지르며 줄행랑치는 서슬에 되레 내가 깜짝 놀라기도 한다. 그들에게 인간의 탈을 쓴 나는 괴물처럼 두려운 존재인 모양이다.

  며칠 전 신문에는 두려움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렸다. 동서베를린의 장벽이 무너진 지 올해로 꼭 20년, 그런데 놀랍게도 동독의 사슴 떼들은 결코 서베를린 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은 철거되고 아무것도 없는 예전의 고압선이 지나던 장벽 자리까지 오면 반드시 동독 쪽으로 되돌아간단다. 그때의 사슴들은 이미 죽고 없지만 대(代) 물려 유전자에 각인된 학습의 결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기사를 놓고 유추해보면 야생동물들이 인간에 대한 경계심과 공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 해답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무시이래로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면서 다른 종(種)의 생명들에게 어떤 짓을 해왔는지를 말이다.

 요즘 사냥철을 맞아 멧돼지는 2만 마리 까치는 무제한 포획(捕獲)을 허가하고 있다. 죄명은 농가에 연간 추정액 약 37억 원 상당의 피해를 주는 ‘유해야생동물’이라는 것이다. 포획허가에는 고라니 청설모 꿩 멧비둘기 참새 어치 청둥오리 백로 등이 더 있다. 말이 포획이지 사냥개와 함께 총을 들고 2만 4,212명의 허가받은 사냥꾼이 산야를 누비며 닥치는 대로 무자비한 살상을 벌이는 것이다. 이들이 포획할 야생동물의 숫자는 무려 36만 5,056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농가를 보호하고 늘어나는 야생동물의 개체수를 줄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하지만 귀중한 생명을 앞에 놓고 꼭 이런 참상을 매년 되풀이해야만 하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부처님께서는 <대지도론>에서 ‘시비왕과 비둘기’이야기를 통해 모든 생명의 존귀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시비왕이 비둘기를 구하고자 매에게 비둘기의 몸무게와 똑같은 양의 자신의 살을 베어 저울에 올리지만 아무리 살을 베어 올려도 비둘기 쪽의 저울이 더 무겁다. 마침내 왕이 자신의 온몸을 저울에 올리니 그 때서야 저울대가 비둘기와 평형을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인간이 아닌 미물일지라도 생명의 무게, 그 생명의 가치는 누구나 같다는 귀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영악한 인간의 이기심은 자신의 하찮은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의 침탈에 주저함이 없다. 

  이 땅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참으로 만물의 영장이라면 저 ‘시비왕’과 같은 경지는 아니더라도 자비심을 갖고 가여운 생명을 보호하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현명한 대안을 마련할 줄 알아야 하리라. 이 삭막한 겨울, 지난여름 날의  싱그러운 까치와 너구리의 정경을 떠올리며 내 안의 자비심 키우기를 간절히 발원한다.

임완숙

인드라망생명공동체 공동대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