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다시 한 해를, 고맙게 새해를 맞이합니다.

당신께 새해맞이 인사를 하는데 어떻게 인사를 해야 좋을까 하고 잠시 제 마음이 머뭇거려진 것은 해마다 새해라는 이름으로 한해를 맞으면서도 정말 오롯하게 새해맞이를 했다는 느낌이 별로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요.

지금 당신과 내가 맞이하고 있는 새해라는 이름의 이 한 해는 그냥 주어진 시간이 아니라 이번 생에서 우리가 새해라는 이름으로 맞이하고 보내었던 그 숱한 새해들의 이어짐 위에 있는 한 해 단위의 시간임을 생각합니다. 새해를 맞는 이들마다 그 감회가 다른 것은 이처럼 지난 시간의 다른 그 경험들이 저마다의 생각들로 그렇게 이어지 있기 때문이라 하겠지요. 그것 또한 시간의 상대성일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맞는 이 한 해는 정말 새로운, 일찍이 그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온전한 새로움의 한해입니다. 마치 청정하고 여여하고 충만한 존재의 본성처럼 어떤 기억이나 정보도 갖지 않는 시간 그 자체로서의 순수한 본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이 주어진 이러한 시간의 순수성, 그 눈부신 은총과 축복 앞에서 이 시간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 또는 나의 존재에 의해 새해, 그 삼백예순 닷새의 의미와 내용이 달라지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시간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것이라기보다 우리의 개입이 시간의 순수성을 그렇게 왜곡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의 생각 또는 그 행위로 시간 위에 그렇게 흔적을 새기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새해의 새로움은 이 새해를 맞는 우리가, 나 자신이 얼마나 새로워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내가 새로워지는 것만큼 나의 한해 또한 새로워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기 위한 우리의 준비라고 하겠습니다. 마치 그리운 임을 맞이하기 위해 집 안팎을 청소하고 몸을 씻어 단장하는 것처럼.

지난 한 해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걸어온 날들과 남은 날들을 헤아려봅니다. 시간의 그 무한성 속에서 이번 생에 내게 허락된 시간의 길이를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내가 보낸 시간보다 내게 남은 시간이 훨씬 짧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게 아쉬움이라기보다는 남은 시간을 보다 소중하게, 오롯하게 모셔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오롯함이란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음이라 하겠지요. 깨어 있음만이 매 순간을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있게 하는 유일한 길인 까닭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에서 이렇게 존재할 수 있게까지 천지부모의 그 가없는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그 자명한 사실을 잊지 않고 고마움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당신께 다가가는 것이 깨어 있는 일이라 여깁니다. 외딴 섬조차 물아래서 굳건히 이어져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 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없음을 압니다.

새해 한해를 품을 말로 받아들인다는 뜻의 ‘수(受)’를 생각합니다. 어머니 대지처럼 어느 것 하나 가림 없이 다만 고맙게 내게 다가온 모든 것을 내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 품을 수 있기를, 이번 생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이유가 다만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서임을, 당신과 당신을 여기에 있게 한 그 모든 당신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고 가고 머무는 자리 어디서건 할 수 있는 한 사랑으로 행할 수 있기를 마음 모읍니다.

새해 첫 아침 고마운 당신께 온몸으로 삼배 올립니다. 당신이 열어가는 새해, 깊은 평화 가운데서 더욱 생기차시길 두 손 모읍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습니다. 

이병철(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도위원, 지리산마음학교장)